도둑놈은 도둑놈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운동선수도 상대방을 보고서 운동선수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봅니다.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같은 계통에 살고 있으면 상대방을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을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쉽게 판단합니다.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 내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모습이 맞다고 단정을 짓기 전에 자신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지도 않으면서 하는 판단은 절대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놈이 도둑놈을, 운동선수가 운동선수를,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처럼, 상대에 대한 알아차림은 그 모습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틀린 점을 발견했다면 내 안에 그 틀린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겸손이 늘 필요합니다.
‘내 안에 그 모습이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판단하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할까요? 사랑을, 평화를, 친절을, 기쁨을….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가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을 통해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가 ‘평화’일 정도로 평화를 강조하신 분이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악에 순응해서 얻어지는 거짓 평화가 아닌, 참된 평화를 가져오시기 위해 칼을 들어 거짓 평화를 잘라 버리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칼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세상의 모든 악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편하고 쉬운 것,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것만을 따르는 것이 아닌,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이는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