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를 주고 보속으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한 번만 정성껏 바치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겨우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죄에 비해 보속이 너무 적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보속만큼 무겁고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이 보속을 드립니다.
어느 유명한 영성가로 알려진 신부님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신부님은 매번 주님의 기도 딱 한 번을 보속으로 주신다고 합니다. 이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이고, 이 기도의 내용 역시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뜻이 먼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 부분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게 되니 말입니다. 실제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면 늘 탈혼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짧은 기도가 아닌 아주 긴 기도가 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성모송,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영광송까지 더하니 어떻게 가벼운 기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중요하고 그 무게가 대단한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너무 쉬운 보속을 준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너무 어렵고 힘든 보속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늘 먼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뜻은 주님의 기도 후반에 나오는 용서를 통해 구체화 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통해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우리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우리의 잘못도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하기를 너무나 어려워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찾으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멀어질 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만 우리는 참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