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오늘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완전히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큰 사랑, 구원의 은총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탈출 19,5)로 택하신 옛 이스라엘을 의미하기도 하고, 교회라고 하는 새 이스라엘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원을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에서 시작하신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5-6).
탈출기에서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보면서 사랑과 충실성을 요구하고 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그러기에 사랑과 충실성의 응답이 없다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은 무너진다. 계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소유물이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 즉 사제들의 나라(탈출 19,6)로서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들을 고양해야 한다. 특별한 모습으로 봉헌된 이스라엘은 그들의 사랑으로 그들을 선택해주신 하느님께 합당하도록 무엇보다도 거룩한 삶을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11,44-45; 17,1). 초기 교회도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계약(참조: 루카 22,20)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묵시 5,9-10; 1베드 2,9-10 참조).
복음: 마태 9,36-10,1-8: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파견하셨다.
오늘 복음은 그때까지의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하면서 동시에 열두 사도를 부르셔서 파견하시는 장면이다. 그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들(9,36)과 추수할 것에 관한 것 때문이다(9,37). 그래서 바로 양들을 위한 목자들과 추수를 위한 일꾼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 사명을 이루는 데 있어서 협력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천상 아버지께서만이 우리가 청하면 일꾼들을 보내주실 수 있다(9,38). 즉 구원은 모두 하느님께 달려있고 그분에게서 온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목자가 될 수 없으며, 선발할 수 없다. 다만 목자를 보내달라고 청할 수 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9,38).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추수도 하느님께 속하는 일이고 일꾼들도 그분의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10,1) 사도라고 하시는데(10,2), 사도란 파견된 자란 뜻이다.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즉시 선교사명으로 연결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것을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10,6)에 제한하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행하신 파견의 모습이다. 복음 선포가 보편적으로 펼쳐지는 것은 주님의 부활 이후의 일이다(참조: 28,19). 그리고 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파견된 사도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구원의 선포 자체를 반복하고 있고(10,7), 또 구원적 행위 그 자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10,8). 이것은 예수님의 행위와 업적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한 가지는 복음 선포에 있어서 구체적인 삶과 활동에 밀접히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말과 행동의 일치에서만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난다”(J. Jeremias)라는 것이다. 사도로서 해야 할 역할이 어렵고, 많은 사람이 선뜻 용기를 가지고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야 한다.”(9,38). 일꾼들의 모습은 말씀이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가 전하는 말씀이 자신의 실제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칫 독선과 이기주의로 표현되어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까지도 되돌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더구나 그것이 사목을 책임 맡은 자의 삶일 때, 더욱 충격의 파장이 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사도로 부르시어 파견하신 것은 목자 없는 양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 자신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바로 복음 선포와 행동이 일치되어 올바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복음 선포의 대상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이다. 어디서나 우리의 삶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 또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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