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2,35-37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드립시다!
저희 살레시오회는 철저하게도 중앙집권제입니다.
총장님, 그의 대리자 관구장님을 예수님, 돈보스코의 대리자로 여기고 철저히 순명합니다.
가끔 전 세계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보내주시는 서한은 교과서 중의 교과서로 여깁니다.
읽고 또 읽고 마음에 새기고 구체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최근 내려오는 지침이나 과제 가운데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르코 복음의 표현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마르 12,37)
이 땅에 육화 강생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왕 다윗왕과는 비교 조차 안될 정도로 크고 높으신 분임을 암시하십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가, 오늘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과 선택 앞에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는가, 하느님은 오늘 내 삶 안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한번 점검해볼 일입니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미묘하고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이 깊숙이 숨어있는가 하면,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이타성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정말 나약해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별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때로 얼마나 선해질 수도 있는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런 우리 인간이기에 고른 성장이 필요합니다.
지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위한 노력, 인간적 성숙을 위한 노력, 육체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죽기 살기로 달달 외우고, 반복해서 문제를 풀어 좋은 성적 내는 것이 지상과제입니다.
무한 경쟁 체제, 일렬로 줄 세우기 문화 앞에서 함께 가는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나만 잘 풀리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의 영역, 신앙이 설 자리가 점점 축소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게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신앙과 배려에 대해, 가난과 겸손의 덕에 대해 이야기 하면 웃어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말 어려운 시대, 참으로 다양한 도전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럴수록 신앙인들은 더 외쳐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이사야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그분의 참되심을, 결국 그분께서 승리하실 것임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위치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해오고 등한시해왔던 하느님의 위치를 다시금 재설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내 삶의 최우선 순위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위치를 자리 매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하느님, 우리 뇌리 속에서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시는 하느님을 다시 한번 삶의 중심으로, 정신이나 사고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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