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2,1-12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그 신뢰한다는 것이 참 힘든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세상이 하도 흉흉하다 보니 사기꾼들도 많아지고, 서로를 속이고 이용해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보니
일단 한번 의심해보는 풍조가 보편화된 듯합니다.
이런 풍조는 예수님 시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선량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끊임없이 현혹시켰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의 타락과 착취는 백성들을 불신과 의심, 불안의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조차도 거부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그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 특히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일생일대를 건 도박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는 정확한 목표선택과 그 목표를 향한 철저한 투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강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신앙,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저지른 과오 중에 가장 큰 과오는 가장 값진 보물이 자신들의 손안으로 굴러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물을 절벽 밑으로 멀리 던져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 자신들을 죄와 악에서 구해줄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코앞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교만함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재물이나 권세, 명예에 눈이 단단히 먼 사람들입니다.
가끔 밑으로 내려가 인생의 밑바닥 체험도 기꺼이 할 줄 알아야 되는데, 끝도 없이 올라가려고만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우리의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는 쪽과 거부하는 쪽. 불행하게도 많은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저지른 실수 가운데 가장 큰 실수, 일생일대의 대실수였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이루어졌었던 배신의 역사, 반역의 역사는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역사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과분하게도 하느님께서 나를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미물 같던 나를 애지중지 돌봐주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아무 상관없는 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처음의 나를 생각하면,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정답이 바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불만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소작인들처럼 잔머리 굴릴 일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남의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과분하게 생각하면서, 그저 기뻐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