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수난 죽음 부활이라고 하는 구원의 업적이 모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임을 고백하면서 이 신비를 거행하게 하였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우리 구원의 주역이시며,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살아있는 궁전”(1코린 6,19)이다. 바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인이 살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생명의 공간이시며, 삶의 모델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성 삼위의 이름으로 인사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 이 말씀은 전례 때에 당시의 신자들이 서로 포옹하면서 삼위일체의 축복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에게 먼저 오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구원의 은총은 무상임을 알게 해주며,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은총임을 체험하게 한다. 가장 근본적인 은총이 바로 그분이시다. 다른 은총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모습, 사랑의 참모습도 발견하게 해준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크다.
하느님의 가장 큰사랑으로 표현된 선물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결정적인 말씀이시다. 그분은 아들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고귀한 실체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여 주셨으며, 그럼으로써 이제는 또한 당신의 자녀들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고자 하셨다. 이제 우리도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듯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성령의 친교란 성령 안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를 이루는 성령의 능력도 뜻한다. 즉 성령은 우리를 결합하는 원리이시고, 교회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분이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 안에 드러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실제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격과 사명으로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신비스럽게 하나로 일치시켜 영원히 결합하는 사랑이시다.
복음: 요한 3,16-18: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잘 소개되고 있다. 아들을 보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구원적 사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하느님이 무한하게 사랑하시는 분으로 게시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16절). 여기서 내주신다(parédo ken)는 말은 죽게 하다(갈라 2,20; 로마 4,25; 8,32 참조)의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랑의 선물로 주시기 위해 포기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은 모든 인간과 우주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포용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기 거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무서운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큰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을 떠난 멸망의 상태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신비를 사랑의 신비로 강조하고 있다. 탈출기 역시 이런 의미이다.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 34,6) 라고 선포하신다. 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나타나실 때, 그 사랑은 무한히 펼쳐질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 놀라운 삼위일체의 구조를 실현하는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이 성취되는 곳이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구분되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서로의 개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Y. De Montcheuil). 삼위일체의 신비가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이제 먼저 우리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삶으로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을 수 있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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