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오늘은 부활 시기가 마무리되는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성령은 오늘도 주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사화는 구약의 시나이 계약(탈출 19,16-20)과 성령의 창조적 능력으로 모든 민족이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넘어 이루는 거대한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와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접촉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길처럼 흔적을 남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귀먹은 이들의 꽉 막힌 귀까지도 뚫어주신다. 루카는 성령강림을 시나이 백성의 새로운 계약의 공적인 시작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율법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내리시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율법이 된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각자의 내면에서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가르쳐 주시며 또한, 그것을 판단하여 실행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삶의 형태도 이루어 준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의 오순절과의 근본적인 새로움은 하느님께서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의 성령”(갈라 4,6)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당신 자신으로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제 성령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민족을 부르셔서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신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순례자는 모든 민족의 대표자로 제시하는 것이다. 언어의 기적도 모든 사람이 단일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온 세상 곳곳에 사는 우리가 같은 계시 진리를 믿고 있고, 또한 “하느님의 위업”(11절)을 기념하여 거행하고 있는 오늘도 그 여러 가지 언어의 기적은 계속 실현되고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께서는 공동체에 주어진 카리스마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모든 은총의 선물들이 단일한 성령에게서 온다고 강조한다(1코린 12,4-7).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총의 선물을 잘 사용하여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하나인 것이다. 즉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코린 12,12). 그러므로 우리의 개인적인 특별함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계발이 철저히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다양성은 전체 또는 공동체를 향하지 않을 때 조직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 다양성으로서 각 부분이 개별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수 있을 때 전체는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구성원들이 신앙과 사랑과 활동을 통하여 서로 일치할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바로 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즉 오순절 날 구원의 메시지를 여러 나라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언어와 문화와 종족과 심지어 종교의 장벽까지도 뛰어넘어 다 같이 하느님의 크신 일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신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은총의 선물에 들어있는 선물의 특성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참조: 1코린 12,3.13).
복음: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예수께서는 부활 축일 저녁에 성령의 선물을 숨을 내쉬시며 주셨다.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성령의 선물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바로 죄가 신자들의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신자들의 공동체란 본질적으로 사랑과 은총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죄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형제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죄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러한 죄의 상태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평화’의 선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가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령 안에서 신앙인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그분 안에 생기를 되찾고, 악과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나약해지는 이 세상에도 ‘생기를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라고 표현한다. 관계라고 한다면 ‘사랑의 관계’일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삼위일체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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