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1-7
베드로 1서 2,4-9
요한 14,1-12
오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고 있습니까?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 영적 삶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갈망은?
아마도 ‘평생에 걸쳐 단 한번만이라도 하느님을 얼굴을 한번 뵈었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게 너무 과도한 바람이라면 ‘적어도 하느님의 음성이라도 직접 내 귀로 들어봤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필립보 사도는 이런 갈망을 아주 강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8절)
아직도 갈길이 먼 필립보 사도, 아직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필립보 사도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나머지 예수님의 큰 탄식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요한 복음 14장 9~10절)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앙 여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들 머릿속에, 마음 속에, 삶 속에 명료하게 자리잡아야 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파악하고 있는 바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입니다.
두분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 불가분의 관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뵙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00퍼센트 하느님의 의중을 반영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통해서, 하루에 몇번이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두분은 언제나 상호내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그 단순하면서도 신비스런 진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오늘 우리네 신앙 생활 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 명제입니다.
돈보스코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던지, 모든 측면에서 모방했던 후계자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에게 후배 살레시안들이 별명을 하나 붙여드렸는데, ‘제2의 돈보스코’ ‘목소리 빼도 돈보스코와 똑같았던 살레시안’이었습니다.
저희 후배 살레시안들은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을 통해 돈보스코를 봤습니다.
또한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돈보스코를 통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순하고 어눌했지만, 진심과 사랑으로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큰 감동과 매력을 느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듣는 동안 온 몸은 전율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즉시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콜코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였습니다.
곧바로 찾아갔고, 그녀의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영적 조언을 들은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마더 데레사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말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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