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0,19-31: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의 주일로 지내고 있다. 전통적으로 부활성야에서 흰옷을 입고 세례를 받은 새 신자들이 흰옷을 벗는 날이라 해서 사백주일(捨白主日)이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그분을 만나는 것 보다 바로 그 제자들의 삶의 증거를 통해 그분을 체험하도록 하여야 한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참으로 부활을 통하여 새로이 태어난 자들로 사는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다. 즉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 습관을 청산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예수께서 부활하시며 시작하신 다른 세상의 시민들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7) 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특징은 마음의 일치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이다. 오늘 복음은 믿음에 대한 두 가지 호소로 끝난다. 하나는 토마스에게 하신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는 말씀과 마지막 부분의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절)는 말씀이다. 신앙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해지며, 부활체험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된 인간적 생활로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째 부분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분은 자진하여 손과 옆구리(20절)를 보여주시고, 토마스에게는 그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신다(27절). 십자가에 돌아가신 같은 분인데, 그분의 존재 양상은 바뀌었다. “문이 잠겨있었는데도”(19절) 제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실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분은 이제 당신이 들어가신 영광, 생명의 보증인 평화와 성령의 선물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 번이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19.21.26절)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말씀이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자신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그 두려움을 없애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선물이다. 평화는 구원의 선이 충만한 상태이며, 여기서 신앙인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 평화의 선물 때문에 파스카는 절대 끝나지 않고 계속 현존하고 있다.
또한 성령의 선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로운 창조의 표지이며 결실이다. 사도들에게 숨을 내쉬시는 행위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가 있다(창세 2,7; 에제 37,9 참조). 오늘 복음에서 주어지는 성령은 죄의 용서와 관련되어 있다(22-23절). 새로운 창조의 의미는 그러므로 인간과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면, 그 죄를 없애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죄에서 해방할 수 있는 권한을 교회는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가장 중요한 선물은 평화와 새로운 창조를 통한 용서라고 하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이 말씀은 두 번째 나타나신 예수께서 다른 사도들의 부활 증언을 믿지 않았던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사랑과 자비의 말씀이다. 여기서 토마스는 믿기 어려워하고 또 신앙을 과학적인 추론이나 증거가 뚜렷한 사실과 혼동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1요한 3,20) 우리의 사리보다 밝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당신 영광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사랑의 행위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믿을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모든 행복은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이상의 것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께 맡겨드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은 이제와 영원히 자기 생명의 참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의탁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보지 않고 믿는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새로이 성령으로 창조된 새로운 사람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시며 시작하신 다른 세상의 시민들, 즉 천상의 삶을 이 땅에 끌어내려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의 영광을 입으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으로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며, 부활하신 주님의 가장 큰 선물, 즉 ‘평화’와 하느님과의 일치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삶은 우리의 모든 여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베드로 사도도 신자들에게 비록 온갖 고통과 박해와 시련을 겪을지라도 기쁘게 살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뵙지는 못했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믿음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에게 당신을 주시어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