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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4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4-04 조회수 : 327

이사야 49,1-6

요한 13,21ㄴ-33.36-38 

 

예수님께 아픈 손가락 같았던 존재, 유다 이스카리옷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요한 복음 13장 21절)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이후,

제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긴박하면서도 미묘한 분위기 속에 두 제자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은 최후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있는 제자입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이 제자에 대한 실명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그 제자는 요한 사도로 추정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품에 기대어!’

이런 행동은 연인 중에서도 연인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통상적인 시선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입니다.

솔직이 남자들끼리 좀 ‘거시기’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의 눈총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저 친구는 시도 때도 없이 대체 뭐하자는거지? 이 긴박한 상황에 저러고 싶을까?

차라리 영화를 찍어라. 영화를!’ 

 

그러나 요한 사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승님을 향한 애정을 온 몸과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존경과 애정이 컸습니다.

요한는 자나깨나 예수님, 앉으나 서나 예수님, 사나 죽으나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이런 요한 사도였기에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예수님께 ‘딱!’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 가까이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세상적, 통속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음에서 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서 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반면 다른 제자 유다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유다는 제자단의 총무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감사의 표현으로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겠지요.

예수님은 받은 예물을 즉시 총무인 유다에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단의 숙식이라든지 생필품 구매를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막대한 돈을 만지게 되자 유다의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스승님을 통해 꿈꾸던 지상 왕국, 그에 따른 물좋은 자리, 지상에서의 복락, 이런 것들이 물건너가버리게 되면, 그때 내 청춘, 내 인생은?

그래! 혹시 모르니 미래를 위해 비자금을 좀 챙겨두자!’며 조금씩 조금씩 공금을 빼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다는 자연스레 스승님 앞에서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늘 멀찌기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결국 말만 제자였지 이미 그는 제자직을 버렸습니다. 

 

그런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처신이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유다의 배신과 부정 행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저 같았으면 공개석상에서 혼쭐을 냈을 것입니다.

제자단에서 축출하거나, 총무 직무에서 뺏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유다의 개인적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끝까지 인내하시며, 유다의 배신 행위를 공개하지 않으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곰곰히 묵상해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애초부터 유다에게 배신자의 운명을 부여하셨을까?

유다의 회개 가능성은 없었을까?

예수님께서도 유다의 운명을 아시고 그가 배신하도록 그냥 방관하신 것일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유다는 예수님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처럼 유다 역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당연히 유다도 예수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의 고백과 회심, 새생활과 구원을 인내롭게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 행위에 대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제자들에게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실명을 거명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끝내 빛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고,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아있었던 것이라고는 철저한 배신과 그에 따른 참혹한 후회, 비참한 죽음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시면서도 무지하고 불충실한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을 걱정하시는 사랑과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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