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26,14-27,66: 마태오의 수난기
오늘이 성지주일이며 성주간이 시작된다.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의 핵심 개념은 자유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자유로써 죽음을 맞으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이 뜻 때문에 자진하여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손에 당신 자신을 맡기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26,39).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6,42)
그리고는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26,45-46)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때’에 맞춰져 있음을 본다. 그때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될 ‘때’이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이 외에도 예수께서 현실에 이끌려 가시지 않고 자유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26,24), 또는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26,55-56). 이것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순명(참조: 필리 2,8)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주님과 같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갖는 삶이 되어야 하며 그 뜻을 이루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완성하는 그때가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때이며, 그것이 올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죽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삶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에는 예수님을 ‘죽을 죄인’(26,66)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그분의 ‘무죄하심’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고(27,19),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하고, 군중은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한다(27,24-25). 이렇게 그리스도와 길을 달리함으로써 절대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백인대장의 고백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
여기서는 또한 인간들의 잘못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빌라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사형장에 내몰고 있지 않은가?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조차도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깨닫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단죄하고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삼십 은전에 팔았고, 베드로는 큰소리를 치고도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유다처럼 돈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마저도 팔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목을 맨 절망적 행위는(27,5)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에만 눈이 어두웠던 행위의 반작용이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아직도 용기가 부족하다. 빌라도의 모습은 진리나 정의보다 자신의 안이함을 추구하는 양다리를 걸친 자들이며, 많은 형제의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맥을 놓고 있는 사람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분과 “단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는”(26,40) 사람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수난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그 비극적 사건의 장본인들이 우리이기 때문에 수난사의 주역들이 무대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 자신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어떠한 자세로 있으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수난의 비극을 재현하고 있을 수도 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성주간을 지내면서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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