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죽음이 아니라 삶
[말씀]
■ 제1독서(에제 37,12ㄹ-14)
바빌론 유배시기 동안 수많은 사람이 유배의 땅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없어 보였다.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었으나, 유배지에서 예언자로 불림을 받은 에제키엘은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환시 속에서 그는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에 서 있다. 주님께서 부르시자 뼈들이 일어나 살과 살갗을 갖추어 되살아난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당신 백성을 되살리실 것이며, 당신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이다.
■ 제2독서(로마 8,8-11)
사도 바오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육’은 자기 욕망에 매여 닫혀 있는 세속적인 인간을 가리키며, ‘영’은 하느님 영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의 형태를 말한다. 영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으며, 이웃 형제들과 세상과 의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 새로운 생명은 결코 파괴되거나 소멸할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다.
■ 복음(요한 11,1-45)
복음저자 요한이 전하는 일곱 가지 기적 이야기 가운데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 ‘라자로의 부활 사건’은 우리를 주님의 부활로 이끄는 탁월한 표지 역할을 한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건져내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은 죽음에 빠져드신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것이다. 그분의 몸짓은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이 부활은 미래의 것이기는 하나 라자로 안에서, 그리고 세례받은 신자들 안에서 이미 실현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죽음이 육적이든 영적이든 죽음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추고 계심을 분명히 하신다.
[새김]
■ 삶의 조건들이 나날이 악화하고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 가중되어 갈 때마다 사람들은 흔히 ‘이건 더 이상 사는 게 아니다’라고 호소한다. 그렇다고 삶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그 조건이 어떠하고 헤쳐나가야 할 고통의 무게가 어떠하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들, 나아가 우리 자신, 우리의 습관, 욕망, 두려움이라는 내적인 환경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무덤처럼 우리를 죽음의 세계로 몰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 이러한 무덤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될 대로 돼라’ 하는 체념에 빠지거나, 혹은 ‘죽는 편이 더 낫다.’ 하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이 끝일 수는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의 죽음은 세상사 부조리에 찍힐 최후의 낙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들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역설한다. 다만 그 삶이 진정한 삶이기를 바란다. 진정한 삶, 그러나 그것은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나고 신앙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은총으로 이미 주어진 삶이다. 신앙인은 성령의 빛을 받아 자기 자신을 짓누르거나 그 안에 갇혀 있는 껍데기에서 벗어나, 빛을 향하는 삶, 곧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며, 이러한 삶으로 언제나 죽음을 뛰어넘는 능력을 선사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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