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는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이것은 빛이신 하느님께서만이 인간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시지 않으면 눈먼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고쳐주실 수 없는 소경들이 있다.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이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요한 9,41).
이 빛과 어둠의 대립은 어둠 속에 살다가 세례를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빛”(에페 5,8)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 속에서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며, 모든 어둠의 행위를 어디서든 또 누가 행하든지 고발하고 단죄함으로써 피하라고 권고하고 있다(에페 5,8-11).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빛의 증거자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불의한 일들,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발할 수 있는 예언적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존재 전체, 삶 전체를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
복음: 요한 9,1-41: 태생 소경의 치유
태생 소경에 대한 치유 기적은 우선,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까지 ‘밝음’의 상태에 서서히 이르고 있는 태생 소경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의 진실성이 입증되는데도 그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려 하면서 신적인 현존의 표지 확인을 고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의 모습이다.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소경은 눈을 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28절) 하느님과 율법을 온전히 안다고 하던 자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이 태생 소경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적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다. 신앙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모든 적대행위와 거짓된 논리를 이긴다. 그 소경은 치유 받은 후 모든 사람과 대립하고 있다. 부모들도 위험을 느끼고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돌린다(20-22절). 또한,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온갖 협잡이 이루어진다(16.24절).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쟁점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것이다.
지금 예수께서는 곤란한 문제를 일으키고 계시며, 사람들 간의 의견을 엇갈리게 하는 분도 그분이시다.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생기는 문제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 받은 소경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 소위 지혜로운 자들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사실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28-33절 참조). 그 소경의 신앙이 점점 명백해져 가고 있는 사실도 주목해볼 만하다. 예수님에 관해 연달아 질문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예수님을 예수라는 분(11절) 예언자(17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33절) 이라고 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날 때, 주님(38절)으로 고백한다. 여기서 그의 신앙이 완전해진다. 이제 완전한 의미에서 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시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이신 영광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유다인들은 소경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율법의 근본정신에는 귀를 막고 또 하느님의 판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죄인으로 배척하고 있는 유다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눈이 먼 것은 그들이 빛을 피하여 어둠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며, 그들의 탓인 것이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단죄의 심판을 내리신다(39절). 이 심판은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단죄의 심판이다. 인간들의 구원이나 멸망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능력 여하에 달려 있다.
또 여기서는 세례성사에 대한 가르침이 있음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물을 통하여 밝은 빛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다. 히브리서에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례가 빛으로 제시되고 있다(히브 6,4; 10,32; 에페 5,14 참조). 소경이 눈을 뜬 실로암 연못의 이름도 의미가 있다. 그것은 파견된 자(7절)라는 뜻이다. 이 파견된 자는 바로 성부께 파견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낫게 한 것은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세례는 하나의 빛이다. 그 빛은 우리를 모든 사람에게 보내어 그들도 우리의 빛에 참여함으로써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 다른 사건들을 하느님의 눈, 즉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빛이다. 사무엘기에서도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우리가 주님께 받은 빛을 통하여 항상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그리하여 주님의 빛이 세상에 퍼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빛이 빛나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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