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18,21-35: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베드로가 주님께 제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22절)고 하셨다. 일흔일곱이라는 수의 신비는 이 특별한 수가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많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가 우리에게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께 한없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에게 일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과 셈을 시작한다. 종은 많은 돈을 맡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많은 돈을 잃은 듯하다. 이익을 내기는커녕 엄청난 돈을 잃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임금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탕감받는 빚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려 줌으로써 그를 가르치고자 했다. 그도 그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가?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완전히 철저하게 소외되는 것을 뜻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 7,23; 루카 13,27)라는 가차 없이 무서운 말을 듣는 사람들이다.
종은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고 탄원한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절) 주인은 종이 이 일에서 배워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의 불행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그가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탕감해 주기는커녕 참아주지도 않고 그를 옥에 가두어 빚을 갚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영원히 고문 형리에게 맡겨졌다는 뜻이다. 그는 결코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이렇게 사악한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형제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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