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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1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3-11 조회수 : 339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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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고 싶은 매끈한 피부. 에비앙 천연 광천수를 하루에 1리터씩 추가로 마신 사람 가운데 79%는 피부가 눈부시게 부드럽고 촉촉해져 결과적으로 더 젊어 보이는 효과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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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착각 속에서 살 때가 많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하나의 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정말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상대의 방식을 “틀렸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기도방식이 있습니다. 조용히 침묵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영화를 보면 쉽게 잠듭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영화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눈으로 그리고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지면 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신나게 찬양하는 성령 기도는 조금 힘듭니다. 그렇다고 성령 기도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기도회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조건 갑니다.


다양한 길이 항상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를 이해하는 길이 생기게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른 길을 갈 뿐인 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에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되찾은 아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착한 아들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큰아들입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한 아들만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들이 왔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면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버지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관점에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원망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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