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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9-18 조회수 : 637

물 한 잔도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믿음이 순교까지 이르게 한다.  
 
 
개그맨 김준호 씨가 예전에 도박에 중독됐던 당시의 심정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김준호는 지난 도박과 관련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푹 빠져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박을 시작했을 땐 결혼한 상태였다.
당시 아내가 외국에 있어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며 도박에 빠져들었다”라며 “누구 하나 제어해 줄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중독이 많이 된 상태였다”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피눈물 흘리신 뒤로 두 번 다시 안 하게 됐다”라며 “연예인은 외로운 직업이다. 외로워도 그걸 풀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서 술이나 도박, 마약, 프로포폴, 여자 등 여러 문제에 휩싸이게 되는 것 같다” 라고 털어놨습니다. 
 
우리가 삶의 질을 이야기할 때 김준호 씨가 도박에 빠져있었을 때가 삶의 질이 좋았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삶의 질은 아무래도 목표를 향해 내어 디딜 때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고통을 잘 견뎌내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는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김준호 씨는 다른 것들로 자기가 치러야 하는 고통에 보상해 주었습니다.
이 보상 덕분으로 삶의 질이 추락했습니다.  
 
켈리 최 회장과 같은 사람은 나이 마흔이 되어 빚만 10억을 진 상태였고 죽고 싶었습니다.
삶의 질이 매우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때문에 죽지는 못하고 삶의 질을 변화시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자신이 받아야 하는 고통에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보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술을 끊고, 쓸데없는 모임을 끊고, 드라마와 게임을 끊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참아내야 했던 고통에 대한 보상이었고 이것이 실제로는 그녀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10년 만에 연 매출 6,000억에 이르는 회사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을 ‘만족 지연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 능력이 클수록 삶의 ‘마시멜로 실험’이란 1960년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진이 3~5세의 아이들, 653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 마시멜로를 놓아두고 먹지 말라고 하면서 15분 정도 기다리면 하나 더 주겠다고 하고 아이들이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 보는 실험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그 실험에서 15분 기다려서 먹은 아이들과 바로 집어먹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추적해본 결과, 기다려서 하나 더 받았던 아이들이 사회적 지위가 더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추적 검사의 결과, 우리 삶에서 인내와 절제심이 있는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결론이 도출되어 화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2018년, 캘리포니아 대학과 뉴욕대 신경과학 연구진이 다시 아이들의 환경까지 조사해보니 15분 이상 기다린 아이들의 집안이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자주 먹었거나 먹고 싶다고 하면 어른이 얼마든지 사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라서 기다리고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집어 먹었던 아이는 그냥 놔두었다간 다른 형제에게 뺏기거나 나중에 다시 먹을 기회가 없다는 경험치를 갖고 있었던 가난한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잘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은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에서 온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2012년 심리학 잡지 코그니션(Cognition)에 록펠러 대학의 키드(C. Kidd) 팀이 발표한 마시멜로 실험은 마시멜로를 눈앞에 두고 기다릴 수 있는 아이와 기다릴 수 없는 아이를 만드는 요인은 신뢰감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실험은 1차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아이들에게 1차에서 몇 분만 기다리면 컵을 예쁘게 꾸밀 수 있는 재료를 더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참여한 아이들의 반(14명)에는 실제로 기다리면 미술 재료를 주었고 반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재료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삶의 질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에 따르는 것은 맞지만
그 능력은 “보상에 대한 신뢰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이 신뢰 수준이 곧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보상 없이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오늘은 한국의 순교성인과 복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고통을 즐겨 받았습니다.
사실 생로병사의 모든 고통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죽음이 모든 고통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인들은 이 죽음의 고통까지도 즐겨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 뒤에 오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살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진취적으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고 질 좋은 삶을 산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도 사실은 순교로 나아간 사람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기는 하지만 실제로 보상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랑으로는 그런 경지까지 오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14) 
 
우리는 자녀들이 질 좋은 삶을 살도록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어야 합니다.
부모님은 아픈 자녀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안 죽어!”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떠한 보상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로는 죽음의 고통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보상을 바라는 것이지 거짓말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이성적인 접근입니다.
살아있으면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으면 알 수 없으니 굳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죽음 뒤에는 고통이 없이 인간이 사라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진화론적인 사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면 얻을 수 있는 어떤 보상도 약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은 즐기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가 주는 믿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먼저 불교를 들 수 있습니다.
불교는 원래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애초에 부처님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얼음을 주고 놀라고 했는데 얼음이 녹아버렸습니다.
아이는 얼음이 소멸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어른은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다시 얼음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얼음이 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죽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때 얼음을 물로 만드는 에너지, 물을 다시 얼음으로 만드는 에너지를 주는
절대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을 리 없습니다.
신을 전제하지 않으면서 죽음은 소멸과 생성의 순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만 줄 뿐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하고 산 삶이나 그렇지 않은 삶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순교자가 무슨 삶의 질이 좋았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많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삶의 질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많으면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인생을 항해하는 것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에 떠 있으면 노를 저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이 항해를 통해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지에 대한
명확한 신뢰가 없다면 물에 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우리는 파견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삶에 의미를 갖고 그래야 보상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보상에 대한 믿음은 선택입니다.
이 선택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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