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제대 후에 신학교 복학 전에 사회 현장 체험을 하라는 성소국장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주유소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이 주유소에서 제일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경유와 휘발유를 구분해서 넣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승용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경유를 넣어야 하고, 또 어떤 RV차는 경유를 넣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휘발유라고 합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분에게 꼭 물어보았습니다. “경유 넣을까요? 휘발유 넣을까요?” 그러면 꼭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면 몰라?”
운전면허증도 없었을 때였고, 차라고 하면 버스, 택시밖에 모를 때였으니 당연히 보면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고서도 모른다고, 주유소 직원이 왜 그러냐면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때의 일이 이렇게 떠올려지는 이유는 지금도 보고서 잘 모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고 있습니까? 나의 무지가 하느님의 일을 잘못 이해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유소에서 일할 때는 스스로 모른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물어보아서 실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모르면서도 아는체하며 경유와 휘발유를 바꿔 넣었다면 차주의 소중한 차를 망가트렸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을 물어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행동하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망가트리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매달리는 과부에 관한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귀찮도록 매달리는 과부의 청에 결국 올바른 판결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삶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면 하느님의 창조를 깨뜨리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밖에 많은 이유를 들어 기도하지 않습니다. 정작 이렇게 기도하지 않음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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