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우리나라에서 한 불치병 환자가 ‘안락사’를 요구하는 헌법소원을 냈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그는 하반신이 마비된 척수염 환자로, 스스로 배변 활동을 할 수 없고 수시로 찾아오는 강한 통증은 진통제로도 소용없는 지경이 됐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조력자살’을 돕는 스위스의 한 단체에 가입했지만, 스위스에 동행해야 하는 딸이 국내법에 따라 자살방조죄로 처벌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스위스행을 단념하고 결국 헌법소원을 냈지요. 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죽음이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속하는지 여부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그러면 안락사는 무엇이고, 교회는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요?
안락사(euthanasia)는 어원적으로 볼 때, 그리스어 “eu(좋은, 아름다운, 편안한)”와 “thanatos(죽음)”가 결합된 단어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임종자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평온히 맞이하는 ‘평화로운 죽음’을 지칭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극도의 고통을 피할 목적으로 죽음을 초래하기 위한 행위나 방조’로 이해되고 있지요. 한마디로 안락사는 환자의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 흔히 말하는 ‘존엄사’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존엄사는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진입한 환자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과도하고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겸손하게 수용하는 것이 존엄사라면, 피할 수 있는 죽음을 적극적인 행위나 소극적인 방관을 통해 인위적으로 앞당기려는 것이 안락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에서도 안락사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단호한 어조로 비판하고 반대하지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입장은 이미 1957년 비오 12세 교황 이후로 견지해 온 것이지요.
그러면 교회는 왜 안락사를 반대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되어야 하고, 인간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한이 결코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교회의 확고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락사가 합법화될 경우, 무언의 압력(경제적 이유나 부양가족의 부담 등)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환자들이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예수님 지상생활의 마지막 여정을 떠올려 봅니다. 하시고자 했다면 간단하게 세상을 구원하고 승천하실 수도 있었을 그분이, 굳이 사람들로부터 매 맞고 채찍질 당하고 갖은 모욕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의 고통이 성화(聖化)되었고, 그분의 고통으로 우리의 고통은 구원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더는 무의미한 고통은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불치병 환자는 스위스의 자살여행 소식을 접하고 ‘희망’이 생겼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과연 그가 희망했던 것은 죽음일까요? 아니면 구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