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한 여인이, 베드로 사도가 아기를 가슴에 안고 하늘에 올라 하느님께 봉헌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여인은 꿈을 꾼 지 얼마 후에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바로 후고(1053~1132)입니다. 부모는 그 아기가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할 것으로 생각해 정성을 다해 키웠습니다. 후고는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신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신부가 된 후에는 교회의 장상(큰 어른)들로부터 신뢰를 받아 교회가 맡긴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후고 신부는 특히 교황을 도와 가톨릭교회를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는 자신의 측근을 교회의 성직자로 임명했는데, 그러다 보니 교회가 점차 타락했습니다. 교황은 빼앗긴 교회의 권한을 찾아오기 위해 독일 황제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후고 신부는 이러한 싸움에서 교황을 도왔습니다. 황제는 교황의 폐위를 결의했지만, 반대로 교황이 황제를 파문했습니다. 결국 황제는 항복해 이탈리아 카노사에 있는 교황을 찾아가 눈 속에 맨발로 서서 사면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사에 기록된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후고 신부는 주교직을 권유받았으나 수도원에서 은수자로 조용히 살고 싶었기에 극구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후고 신부를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주교가 되어 사목할 곳을 가보니 모든 것이 엉망이었습니다. 신자 대부분은 냉담 상태였고, 영성과 도덕은 밑바닥이었습니다. 후고 주교는 자신이 앞장서서 신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밤낮없이 고해성사를 주었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내주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단식과 기도도 끊임없이 했습니다. 또한, 성직 매매를 절대 금지했고, 신자들의 고리대금업도 그만두게 했습니다. 게다가 성직자의 윤리 의식과 규율을 강화하고, 사제 독신제를 정립했으며, 교구 재정도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해냈기에 교구 신자들은 후고 주교를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교구에 수도원이 설립되자, 후고 주교는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려고 교황청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후고 주교는 일주일에 며칠씩 수도원에 머물며 기도했습니다. 일선 사목에서 많이 지친 후고 주교는 결국 건강이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후고 주교는 병의 고통을 ‘신자들의 죄에 대한 보속’으로 생각해 이를 견뎌냈습니다. 이렇듯 후고 성인은 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았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