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품을 앞둔, ‘대품 피정’ 때의 일입니다. 여러 선·후배 신부님들이 그러하셨듯이, 저 역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고대했던 순간이었음에도, 정작 부제품을 받을 때가 다가오자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자매님들이 ‘내가 이 남자와 한평생 살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는 마음과 비슷할까요? 제게 그런 마음이 든 건 부제품·사제품을 받고 도중에 포기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다가와 제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한편, 대품 피정에 참석하기 전,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들어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동기들은 각자 부모님께 편지를 쓴후 피정에 임했고 피정 중 어느 날, 부모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셔서 ‘답장’을 전해주시고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에, “사제직을 지향하고 살다가 중간에 포기하게 되면 어쩌죠? 그러면 괜히 저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질 텐데, 그러면 안 되는데….”라고 썼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런 답장을 하셨습니다. “아들! 아니, 이제 아들 부제님, 다른 사람들이 그래선 ‘안 된다.’라고 해도, 행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긴다고 해도, 엄마 아빠는 ‘늘 아들 편’이에요.”
이 편지를 받은 후에도 제 마음 한쪽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남았지만 다시 한번, 저는 ‘사랑받는 존재’임을 떠올리며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늘 저의 편’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루살렘’은 솔로몬 임금 시대에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은 점차 ‘세상의 이익에 눈먼 장소’, ‘인간의 나약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곳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군대를 앞세워 자신의 세력과 힘을 과시하며 입성한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달리 보면 ‘초라해 보이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릴 때면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예수님이 두 팔을 벌려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는 그 두 팔로 우리를 안아주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맴돕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이기심, 욕심, 나약함이 있는 곳에 가셔서, 두 팔을 벌려 십자가 위에 매달리심은 “나는 언제나 당신 편입니다.”라고 말씀하시기 위함은 아닌지 묵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이에게 모든 고통의 이유를
밝혀 주시지는 않지만, 고통에 함께하시는 현존으로
응답하십니다”「신앙의 빛 57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