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본래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준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실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으로써 인간의 생동감을 고양하는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온전한 사랑은 우리를 불행이 아니라 살아 있게 만드는 기쁨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며 영적 기쁨을 잃지 않았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기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포기와 빼앗김, 고통스러운 희생의 상징으로만 이해해, 부담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명이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가치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불행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완전함을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할까요? 제2독서를 인용하자면,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고, 우리의 사랑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내어줌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에페 2,9-10 참조). 스스로 다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에게 십자가 사랑은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악’은 단순히 비윤리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자신의 사랑을 온전하다고 여기는 교만함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나에게 부담인지 기쁨인지,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성찰하는 가운데 우리는 영적 상태를 식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넘치게 드러내는 사순 시기는 우리를 더없는 기쁨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무거운 얼굴로 일관되게 사순 시기를 보낸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더 기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여 사랑의 참뜻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기쁨 중에 엄청나게 풍성한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입당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