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제2독서인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를 읽다 보면 매우 감동적인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이기심과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는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삶을 사셨는지, 어떤 죽음을 맞이하셨는지, 바오로 사도가 아주 절절한 목소리로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저는 이런 마음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만족하고 그쳐서는 안 되며, 한없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겸손을 우리 안에 꼭 간직해야 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머리로는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제가 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은 늘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마치 아버지의 포도밭에 가서 일하겠노라 말만 하고서는 가지 않은 아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과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십니다. 대답만 하고 포도밭에 가지 않은 아들일까요? 싫다고 말해 놓고 마음을 바꿔 포도밭에 가서 일한 아들일까요?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실천이 따르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대상이 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과 “실천”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하느님 나라”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맞지 않았던 세리와 창녀들은 ‘그들이 만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판단했지요. 하지만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 살게 될 이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말로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나라를 가지려고만 했을 뿐, 그곳에서 하느님과 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바친 세리와 창녀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가지려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우상과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로 돌아서고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구원의 삶을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나요? 혹시라도 내가 만든 하느님 나라에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는지 곰곰이 묵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글ㅣ조태현 스테파노 신부(문경 성 요셉 치유 마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