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악을 허용하시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 ‘가라지’는 오늘날 화본과 식물인 ‘독보리’(서양의 독밀, 중국의 피)에 해당합니다. 1년초인 가라지는 밀과 생김새가 흡사하여 생육 기간 중에는 분간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는 시기에 비로소 밀과 가라지는 구별이 됩니다. 밀은 열매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지만, 가라지는 꼿꼿이 줄기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악한 자의 자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하늘 나라의 자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마태 13,2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현재 세상을 살아가는 종(우리)에게는 밀과 가라지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판단과 식별은 세상 심판 때 우리와 같은 종이 아닌 주님의 일꾼(천사)이 수행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종(우리)에게 선과 악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악을 제거하거나 응징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시기(자신 혹은 세상의 종말)에 자신이 가라지가 아니라 밀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일일 것입니다.
한편, 이 비유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죄와 악의 근원에 대해 표현할 때 희랍어 ‘스칸달론’(σκανδαλον)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18,6)에서 명사 ‘스칸달론’을 사용하고,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18,8)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18,9)에서는 동사 ‘스칸달리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에게 있어서 이 스칸달론은 인간 자체 혹은 전체가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사람을 더럽히는 그 무엇, 즉 인간의 마음’(καρδίας: 카르디아, 마태 15,17-20)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마음, 즉 죄의 근원인 욕망의 자아를 결코 뽑아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병을 일으키는 자아(악한 가라지)는 영적으로 건강한 자아(선한 밀)와 함께 세상 끝날까지 우리가 함께 안고 가야 할 우리 존재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칸달론, 즉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을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3,41-42). 이것은 문장 그대로 ‘마지막 심판 때 모든 죄인은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처럼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이 말씀을 묵상해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죄와 욕망의 원천(스칸달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세상의 악과 싸우고 있는 신앙인들을 향한 경고이기에 앞서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글ㅣ박현민 베드로 신부(중견사제연수원 영성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