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돌아온 탕자(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자유’를 찾아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결국 아버지 집의 ‘안정’을 찾아 돌아옵니다. 반면 영화 ‘빠삐용’의 마지막은 절해고도(絕海孤島)에 갇힌 채 ‘안정’된 삶을 선택한 드가(더스틴 호프만)가 지켜보는 가운데 빠삐용(스티브 매퀸)이 절벽에서 망망대해로 뛰어내려 ‘자유’를 찾아 떠나가는 장면입니다.
‘안정 對(vs) 자유’ 이 두 가지는 양립(兩立)할 수 없는 것일까요? 70년대는 안정을 위해 자유를 유보해야 한다는 세상이었습니다. ‘국가(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는 희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논리는 여러 독재 체제를 포함하여 수없이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반면 생텍쥐페리와 같은 ‘자유 영혼’ 중 상당수는 히말라야, 사하라 등 험지에서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안정과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한쪽을 포기하도록 강요합니다.
정형외과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깨 관절은 우리 몸에서 자유도(운동 범위)가 가장 큰 관절인 대신, 안정성이 낮아서 탈구(빠짐)가 잘 발생합니다. 반면에 골반-대퇴골 사이의 엉덩이 관절(고관절)은 훨씬 안정적이어서 탈구가 드문 대신,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 때 어깨를 돌려 크게 원을 그리는 것 같은 회전운동은 할 수 없습니다.
지구상 유일한 ‘움직이는 수직 기둥’인 척추 역시 ‘안정과 자유’라는 양 측면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척추가 수직 기둥으로서의 안정성과 동시에 운동기관으로서의 자유도를 가질 수 있도록 25개 마디(분절)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각 마디에서 조금씩 일어나는 운동이 합쳐지면 엄청난 운동 범위가 가능해지는데, 그럼에도 안정성은 유지됩니다.
척추 골절의 수술 치료 시, 그동안은 ‘안정’이 가장 중요시되었습니다. 금속 고정에 골(뼈) 이식까지 추가하여 철근-콘크리트와 같은 튼튼한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고전적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없을까요? 고정된 분절은 운동 범위(자유)를 잃게 됩니다. 특히 젊을수록 척추의 움직임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저는 척추 골절에 대해 일정 기간 금속 고정으로 안정을 얻은 뒤 골절 유합 후 금속을 제거, 운동을 회복하는 치료법을 국제학회지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골절이 붙는 데(유합) 필요한 기간은 안정, 유합된 후에는 자유를 추구한 것이지요.
사회적 관점에서의 ‘안정’은 현 상태를 가능한 오래 유지하려는 것으로, 기득권자에게 더 중요한 요소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마태 19,21)라고 하자, 풀이 죽어 떠나갑니다. 안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마태 4,21) ‘배와 아버지’로 상징되는 안정을 버리고 곧장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안정’보다는 ‘자유’(의지와 선택, 실천)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글ㅣ김용민 베드로(국립경찰병원 정형외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