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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불의 신비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3-06-30 09:12:26 조회수 : 366

신자라면 한 번쯤은 아무도 없는 성당에 가만히 앉아 기도를 드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감실 쪽 빨간 불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고요함이 때로는 마음의 위안이 되고, 잡념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릴 적부터 마음이 힘들 때마다, 답이 잘 안 보일 때마다, 우울감이 몰려올 때마다 저는 조용한 성당을 찾곤 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성당에 앉아 빨간 불을 응시하며 묵상했던 그 시간이 제 뇌리에 선명한 기억으로 모두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세례와 첫영성체를 하기 위해 교리가 뭔지 이해도 못하면서 그저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 20분을 걸어간 성당에서 감실을 바라보던 제 모습, 반주자로 봉사하던 고등학생 시절 연습 전 마음을 가다듬고 힘들었던 한 주를 고백하던 그 순간, 3 때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아 성당 안에서 펑펑 울던 제 모습, 인턴 시절 병동을 찾기 전 몸이 너무 힘들어 잠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성당에 가 우두커니 앉아있던 제 모습,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순간, 첫 아이 임신 후 불안한 마음으로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기도 드렸던 제 모습. 그렇게 제 삶 속 빨간 불은 구슬 꿰듯 이어져 제 신앙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순간들은 제 옆에 늘 저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알아차린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또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수많은 인간 하나하나에 당신과의 추억과 대화, 역사를 만들어 내신다는 생각을요. 여러분의 기억 속에도 각기 다르지만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순간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제가 가진 빨간 불의 기억처럼요. 그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이어지고, 아주 미세하게나마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려 했던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면 억울했던 마음들도, 화가 나고 우울했던 마음들도 사라지고 내가 소유한 이 일상이 내게는 최선임을, 그리고 하느님께서 날 너무도 많이 사랑하고 계심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무더운 여름, 시원하고 조용한 성당 안에서 감실의 빨간 불을 바라보며 하느님과 대화를 시도해 보시면 어떨지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분은 늘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당신을 바라봐 주길 원하고 계시니까요.

 

글ㅣ엄유현 레비나(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