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바벨탑처럼 중동의 하늘을 향해 830m 솟은 세계 최고의 건물, 태평양 언저리 100리가 넘는 바다 위 다리, 땅속을 두더지처럼 뚫고 다니며 건설되는 50km 지하도로. 과학기술 발전에 힘입은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과 짐을 실은 커다란 비행기가 이륙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참 대단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능력(과학-자본-기술력)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아침 최저 기온을 임의대로 1도라도 높일 수 있을까요? 비를 오게 하거나 못 오게 할 수 있나요? 조수간만의 높이와 시간을 바꿀 수 있는지요? 지구-대자연은 고사하고 한 인간의 신체 및 정신조차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악성 종양, 알츠하이머, 조현병 등 신체와 정신의 이상을 원인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나이에 따른 신체 퇴행의 과정을 막거나 되돌리지 못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공동번역 마태 6,27. 루카 12,25)
인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지구상의 물질(건축-토목-기계-농축산), 다른 인간의 신체(외과 의사), 그리고 인간(사회)에 대한 정치 행정적 통제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과학적 업적은 자연의 법칙을 관찰하여 그 과정 일부를 이용, 조작하여서 가능한 것이지, 인간이 순수하게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과일나무 접붙이기, 시험관 임신, 덫에 걸린 동물 구조, 묘목 심어 숲 살리기 같은 것을 ‘창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모기 한 마리도 인간은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죽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간이 자연에 할 수 있는 행위는 ‘제거’나 파괴, 혹은 변형 또는 위치이동뿐입니다.
터져 나온 디스크를 수술로 제거하여 극심한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세상이 된 것도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금속 기구로 인체조직 일부를 제거한 것입니다. 터지지 않도록 건강한 디스크로 되돌리거나, 삐져나오지 못하게 막지는 못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청각 장애인, 시각 장애인, 한센병 환자, 중풍 환자, 하혈하는 여자, 마귀 들린 자를 한순간 치료하신 예수님을, 인간 의사는 흉내조차 내지 못합니다. 저는 40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외과 의사(surgeon)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마친 수술이었음에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생기는가 하면, 수술 중 비관-우려에 비해 치유가 아주 잘된 환자를 볼 때, 인간 의사인 저는 하느님만이 진정한 치유자심을 깨닫습니다. 환자는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기를 바라지만, 의사도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자연의 섭리에 의존 또는 편승할 뿐입니다. 골절된 뼈를 즉시 붙일 수 있는 의사는 없습니다.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쳐 일어나는 골절 치유 과정을 거쳐 뼈가 잘 붙을 수 있도록 최선의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의사의 몫이기에, 저는 스스로를 ‘땜장이 의사’라고 칭합니다.
단풍이 낙엽으로 바뀐 11월 이후, 긴 겨울 동안 식물들은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이 일제히 변합니다. 마른 낙엽 가득 덮인 검은 산자락에서 각양각색 꽃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 중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의 손이 꽃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간섭은 꺾어버리거나 옮겨 심는 것뿐. 인간도 이들 꽃처럼 결국 대자연의 일부로 생로병사의 운명을 타고났으며 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도움을 받아 조금 연장 혹은 개선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운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의 몫은, 하늘이 준 기회를 감사히 받아들여 가치 있게 쓴 뒤 잘 반납하는 것입니다.
글ㅣ김용민 베드로(국립경찰병원 정형외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