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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지킴이 수분리 공소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3-04-28 08:50:14 조회수 : 342

전라북도 장수군의 수분리 공소는 절제되고 기품이 있어 보입니다. 마당까지 길게 나온 처마의 모습이 마치 선비의 도포 모습과 같습니다. 처마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있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입니다. 차고 깨끗한 공기가 확하고 얼굴에 닿았습니다. 공소 마당에 얇게 쌓인 눈은 세상의 소리를 흡수하고, 그 적막감은 공기마저 경건하게 하는 듯했습니다.

 

문고리를 잡고 살며시 열어봅니다. 한옥 공소는 문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공소는 잠겨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삐그덕세월의 소리를 내며 어렵지 않게 열렸습니다. 오래된 목조들이 내뿜는 묵은 내음이 풍겨옵니다. 구불구불한 서까래와 대들보가 순례자의 기분을 좋게 합니다. 제대 쪽 가까운 곳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합니다. 눈을 감으면 묵상하기 좋은 곳이 한옥 공소입니다. 허락된다면 며칠 머무르며 어지러워지고 게을렀던 신앙을 참회하고 싶어집니다.

 

공소라는 건물이 주는 특별한 위로와 안식은 성당이 주는 화려함과는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한지 문살에 어리는 은은한 빛들은 마치 어둠이 존재할 수 없다는 듯 실내를 조용히 밝혀줍니다. 그 흰색 빛들이 참 따뜻해 온몸에 묻은 죄가 씻겨지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액자의 빛바랜 14처를 묵상하며, 먼지 같은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사랑할까요? 용서와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을까요?

 

2014년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기억의 지킴이가 되어달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합니다. 작은 공소들을 순례하면서 박해의 아픈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 선조들의 신앙에 빚진 자가 되었으니 그들의 신앙을 마땅히 공경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진ㅣ이선규 대건 안드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