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저는 친가와 외가 모두 가톨릭 신앙을 지닌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제 배꼽이 떨어지기도 전에 저를 품에 안아 인천 답동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손자를 보듬어 주셨지만, ‘신길 공소(고색동 본당 공소) 회장님’이셨던 할아버지는 신앙에 대해서 절대 타협 없는 무서운 호랑이셨습니다. 바쁜 농사일을 멈추고 먼 이웃 마을 신자들까지 대청마루에 모이게 하여 할아버지가 주관하시는 공소예절 참례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의무였고, 철칙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할아버지가 부담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공소회장이셨기 때문에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 손자라는 것이 떨쳐낼 수 없는 굴레처럼 버겁기도 했습니다.
봄, 가을 판공 시기엔 오일장에서 창호지를 구매해 구멍 뚫린 문을 바르고, 고이 모셔둔 신부님용 이부자리를 손질하고, 음식 준비로 설렘 가득한 잔치 분위기를 물씬 풍겼습니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등잔불 아래 한 땀 한 땀 손바느질해 인두로 다림질한 제 한복을 지어 주셨습니다. 회색빛 신진 지프 자동차를 몰고 검은색 치맛자락 펄럭이며 신부님께서 오시면 가장 먼저 저를 안아 하늘 구경을 시켜주신 후 까칠한 턱수염을 비벼대는 장난을 치셨습니다. 테너 음성에 짙은 눈썹과 덥수룩한 턱수염, 넉넉한 풍채까지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셨던 신부님은 “이 다음에 커서 꼭 신부님 되어라.”라는 어려운 숙제를 단 한 번도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특별하고 소중한 기억들이 많은데 오래전 하느님 나라의 빛나는 별이 되신 신부님과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저의 신앙생활 중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여전히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글ㅣ이명식 가스발(안산성마리아 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