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로 오늘 복음은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보면 함무라비 법전에서 이야기하는 ‘동태복수법’을 떠올리게 됩니다. 동태복수법은 당한 만큼 되갚아 준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함무라비 법전이 사용된 고대 바빌로니아에는 계급이 존재했는데, 같은 계급에 한해서 되갚아주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계급이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면 돈으로 보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계급이 높은 사람은 같은 죄를 지어도 평민보다 내야 하는 금액이 반으로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동태복수법은 똑같이 되갚아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평등한 법이란 인식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고 법전이 사용되던 기원전 1700년에는 초기 국가 시절로 인류가 문명을 이제 막 건설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이때는 제한된 자원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부족 사회의 잔인한 모습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가령 옆 부족이 우리 부족의 재산을 침해한 경우에는 똑같이 재산만 빼앗은 것이 아니라, 재산과 부인과 자녀들까지 약탈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을 이야기하며 과한 보복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동태복수법은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한 울타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시대에서 이 규정은 ‘평등한 처벌’이라는 인식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욕을 당한 젊은 수사님이 스승님을 찾아옵니다. “스승님, 어떤 이가 저를 모욕했으니 저는 꼭 보복하고 싶습니다.” 스승님은 이야기합니다. “여보게, 그러지 말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을 차라리 하느님께 맡기게.” 젊은 수사님은 반박합니다. “그에게 보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이에 스승은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우리는 이제 당신의 돌보심이 필요 없나이다. 우리 스스로 보복을 할 테니까요.”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행동이 아픔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그 아픔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나를 괴롭히기보다는,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용서하며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봅시다.
글ㅣ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봉담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