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상 곳곳에 얼마나 많은 구유가 꾸며져 있을지 상상해봅니다. 각기 고유한 상황에 맞게 다양한 구유의 모습이 있겠지요. 하지만 워낙 소박하게 오신 아기 예수님이시기에 휘황찬란하고 화려하게 꾸며놓은 구유는 왠지 어울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아무리 정갈하고, 소박하게 꾸몄다 하더라도 실제는 훨씬 더 초라하게 오시지 않으셨을까 그려보게 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ㄱ).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여운이 아주 큽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표현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일까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미 익숙한 표현이지만, 처음 이 신앙고백을 글로 옮겨 적던 복음사가의 감동이 얼마나 크고 벅찼을까요? ‘사람이 되셨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표현의 원래 의미는 ‘살’(sarx)입니다. 지극히 고귀하신 ‘말씀’께서 비천한 ‘살덩이’를 취하셨다는 것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깊고 겸손한 사랑을 묵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미천하게 오셨을 예수님의 모습처럼, 우리의 이해보다 훨씬 더 당신을 낮추셨던 ‘육화’의 신비를 누가 온전히 가늠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 또한 심오한 의미를 던져 줍니다. ‘사셨다’(skenou)의 본래 의미는 ‘장막을 치다’, ‘장막에 머물다’입니다. 광야의 유목민족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계약의 궤를 모셨던 ‘성막’과 늘 함께 이동하였고, 이것이 곧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현존이 이제는 살을 취하신 말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고백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기 위하여 가장 연약한 아기로 오신 분께서 훗날 때가 되었을 때 성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십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사건은 이천 년 전 과거에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우리가 드리는 미사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ㄴ)라고 말씀하시며 그 ‘살’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살을 모시는 우리가 바로 그분의 현존(성막)과 육화(살)를 증거하고 선포하도록 불림을 받습니다. 거룩한 성찬 안에서 이런 놀라운 신비로 초대받은 우리야말로 비로소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지 않을까요?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기쁜 그리스도의 미사!)
글ㅣ표창연 프란치스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