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이 종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지니거나 종교에 관심이 없는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원인 중에서 근원적인 차원의 문제에 집중하여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의 근원적 차원에는 올바른 종교 이해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종교의 본래 의미에 대한 부적절하고 불충분한 이해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다시 세부적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종교를 부정하고 종교에 무관심한 이유로 종교로 인한 현실적 폐단과 모순 문제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종교로 인한 전쟁, 종교적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폭력, 자기 종교 혹은 종파를 중심에 놓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대립, 종교 내부에서 벌어지는 폐단과 모순 등의 문제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 같은 종교의 현실적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지니게 됩니다. 종교로 인한 현실적 폐단과 모순 문제는 결코 부인하거나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해명이나 변명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교의 본래 의미를 좀 더 충분하게 이해한다면, 그러한 부분적 폐단과 모순 때문에 종교 전체 혹은 종교 자체의 의미와 가치마저 부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폐단과 모순의 문제를 일으키는 종교인이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대부분의 종교인이 종교 본래의 가치와 의미를 실현하고 있음도 명백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폐단과 모순의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이 충격적이고 종교이기 때문에 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부의 문제 때문에 종교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는 판단은 종교 본래 의미 이해(종교 전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고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종교의 공공성 강화에 관해서도 지난 9월 18일 자 주보 원고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종교의 공공성 강화란 종교가 현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분명한 가치와 의미를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종교가 단지 내세의 삶에 대한 지향성만을 지닌다거나 자기들만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을 위한 현실적인 가르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공공성, 즉 종교가 인간과 세상을 위한 현실적인 가르침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잘 인식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종교의 고유한 특성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종교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가르침은 인간과 세상을 위한 현실적인 가르침으로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이 지점에서 종교의 진정한 의미, 종교의 고유한 특성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는 결코 불합리하거나 비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종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불합리와 비이성적이라 오해하고 있는 종교의 고유한 특성은 사실 ‘비합리’와 ‘초월성’입니다. 먼저 ‘불합리’와 ‘비합리’는 다른 의미입니다. 불합리는 합리의 반대로, 합리적이지 않은 것을 불합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비합리는 애당초(본질적으로) 합리와 불합리의 구분을 넘어서는 차원을 나타냅니다. 합리와 불합리의 구분이 적용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종교의 고유한 특성은 ‘초월성’입니다. ‘초월’은 ‘저 너머’ 혹은 ‘전혀 다름’의 의미입니다. 종교가 제시하는 진리는 현세적 가치나 질서 저 너머의 전혀 다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 너머’ 혹은 ‘전혀 다름’의 의미는 ‘역설’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진리는 역설의 진리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여러 종교의 가르침들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 뺨도 내밀어주어라.”(마태 5,40 참조)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가르침은 표면적으로 보면 현세 삶의 기준과 너무나 어긋나는 내용입니다. 현세 삶의 기준에서는 누가 나의 한쪽 뺨을 때리면 나도 상대방의 뺨을 때려줘야 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다른 쪽 뺨마저 때려줘야 합니다.
불교의 경우에도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 혹은 ‘공(空)’ 개념에서 역설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아 혹은 공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나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고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이 가르침 역시 표면적으로 보면 현세 삶의 기준과 명백히 어긋나는 내용입니다. 현세 삶의 기준에서는 계속해서 나 자신을 가득 채워야 하고 하나라도 더 소유하려 합니다.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에서 강조하는 겸손, 겸허, 자기 비움 등에서도 역설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역설, 즉 현세적 기준과 전혀 다른 가르침을 제시하니 사람들이 종교를 불합리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종교가 현실 삶에 도움이 안 된다고, 무의미하고 허황된 것이라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설의 진리가 지니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는 표면적으로는 말이 안 되고 무의미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이것이 진정한 진리임을 나타내줍니다. 현세적 가치와 질서에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희미해져 버린 본래의 진정한 진리를 새삼 일깨워주는 것이 역설의 진리입니다. 역설의 진리를 통해 우리를 잠식하고 지배하고 있는 현세적 가치와 질서가 얼마나 고질적인지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설의 진리 안에 본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간직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진리가 비록 표면적으로는 너무 멀고 우리 현실 삶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 인간과 세상의 궁극적 의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향한 전환과 변화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