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을 했는데 사람들에게 누명을 쓰거나 억울한 형벌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설령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정당한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벌이 과중하다고 느끼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을 본다면 참으로 불행했을 사람입니다. 옳은 소리를 한 죄로 감옥에 갇히다니요! 하지만 감옥에 갇혀 있던 그의 관심사는 결코 자신의 억울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직접 볼 수 없는 갇힌 몸이었습니다. 그저 찾아오는 제자들로부터 그분의 소식을 전해 들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라고 여쭈었던 그 마음의 간절함을 헤아려봅니다. 그런 요한의 마음을 누구보다 공감하셨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당신이 행하신 일들을 전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분명 이는 오래전 선포된 이사야 예언서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마태 11,5;이사 26,19;35,5-6;61,1 참조). 동시에 갇혀 있던 요한에게는 다른 이로부터 ‘전해 들었던 것’이 그분의 ‘말씀’에 의해 확인되고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말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경고가 아닌, 믿고 바라던 이에게 마침내 전해주시는 축복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떠올리며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ㄴ). 메시아에 앞서 먼저 오기로 된 엘리야로 왔으며, 메시아를 준비한 엘리야로 살았고, 사명을 마친 엘리야로서 하느님께 돌아갔습니다. 다시 오기 위해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랐던 예언자는 이제 죽음으로 진리를 증언하며 자신의 사명을 완수합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보다도 먼저 생명을 바치며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순교의 예형이 되어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삶을 온전히 내어드린 이보다 더 큰 인물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덧붙이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ㄷ). 이 또한 요한을 거슬러 하신 말씀이기보다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위대한 예언자적 삶보다 그 예언의 성취인 하늘나라의 삶이 더 크다는 희망의 귀띔이 아니셨을까요?
대림 제3주일, 그분의 탄생에 앞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에 내셨을지 떠올려봅시다. 물론 세상의 가치라는 잣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감옥에 묶인 몸이어도 그를 감옥에 가둔 이보다 더 자유로워했을 세례자 요한의 마음으로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글ㅣ표창연 프란치스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