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여러모로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를 떠오르게 합니다(2열왕 1,8 참조). 더욱이 엘리야와 그 뒤를 이어 예언자가 된 엘리사의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이 두 이야기의 공통된 장소가 ‘요르단 강’이라는 것 또한 흥미롭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르단 강을 가르는 장면에서 그가 참 예언자임이 드러나듯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는 장면에서 참으로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납니다. 엘리사가 예언자로서 행한 수많은 기적, 즉 나병 환자의 치유, 죽은 아이를 살리는 기적, 빵의 기적 등은 훗날 예수님께서 일으키실 기적들에 대한 예고편처럼 무척 닮아있습니다(2열왕 4,32-35.42-44; 5,14 참조).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을 아는 많은 이들은 요한을 다시 온 엘리야로 알아봅니다(말라 3,23 참조).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의미는 곧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는 의미이기에 적지 않은 동요가 있었을 법합니다. 특히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까지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으니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요한이지만, 그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그들의 시선이 곧 오실 메시아를 향하도록 촉구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마태 3,11ㄴ).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되었던 메시아가 다시 온 엘리야인 요한에 의해 선포되었으나,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습니다. 요한도 헤로데 임금에 의해 처형당했고, 예수님도 유다의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 죽임을 당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과연 예언 말씀이 맞기는 한 것일까?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끝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보이는 이 완벽한 실패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반전’ 시키셨는지 알고, 믿고, 고백합니다. 더불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한계 너머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눈으로 볼 것인지, 신앙의 눈으로 볼 것인지의 선택입니다. 만약 구원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택하기로 한다면, 우리 이해를 뛰어넘는 ‘반전’에 대한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대림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그분의 다시 오심에 한 걸음 성큼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오시는 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세상의 눈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힘을 청해봅니다. 참 임금이신 분께서 얼마나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는지, 그리고 그 반전의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신앙의 눈’으로 기대하며 바라보고 싶습니다.
글ㅣ표창연 프란치스코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