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가이들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따르는 정치적인 종교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모세오경인 ‘토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토라’에는 부활에 관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이들의 부활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들에 따르면 모든 진리는 ‘토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미 모든 것을 말씀하셨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대해 토라에 언급된 내용 이외에는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서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따라 짜여진 ‘하느님의 틀’ 안에서 하느님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 살아 계신 하느님, 산 자의 하느님이시며 자녀를 사랑하시고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활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속한 영생도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복음 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소개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름 옆에 사람의 이름을(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붙이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니까 당신의 이름 옆에 그들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항상 곁에 계시는 분, 즉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라는 의미였습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죽지 않으시고 계속 새로운 것을 말씀하시며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결코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토라를 통해서만 안다고 생각했던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이 전하신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계명을 알고 복음을 알고 주일과 기도에 충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을 다 안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은 매일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그분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신념을 흔들기도 하기 때문에 ‘불편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 뿐만 아니라 성당에서 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도 순간순간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걷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우리와 함께 먹고,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 안에, 우리 옆에 있는 형제자매 안에 사십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날마다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관계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글ㅣ마우리찌오 신부(이주사목위원회 광주 엠마우스 공동체 오블라띠 선교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