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TV 시청이 여가 시간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가 요즘 즐겨 보는 것이 ‘여행’을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최근 여행 또는 캠핑을 소재로 하는 TV 프로그램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여행에 많은 제약을 받아온 상황을 반영한 것이겠지요. 2년여 동안 여행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감적 대리만족을 제공하기도 하고, 또 한껏 위축되어 있던 여행업계에 다시 활력을 일으키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TV 프로그램에 관한 전문 지식이 있거나 대중문화평론가는 아니지만, 평소 TV를 즐겨보는 순수한 시청자의 눈으로 볼 때 최근 여행 소재 프로그램들은 이전과 조금 다른 기획 의도와 내용을 지닌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여행을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들은 있었는데, 그들에서 여행과 여행지는 ‘배경’으로서 의미가 강했습니다. 여행이라는 상황 설정 그리고 도착한 여행지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출연자들의 재미있는 퍼포먼스가 핵심이었습니다.
반면 최근에 방송되는 여행 소재 프로그램에서는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의 의미, 여행지가 간직하고 있는 특별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여행 과정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심리적·정신적 변화와 성장’에 초점을 맞춥니다. 특히 각박하고 치열한 현대 사회 삶 안에서 소진된 인간 내면의 쉼과 의미 추구를 강조합니다. 제가 여행 소재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이유는 공감적 대리만족도 있지만 이들 프로그램이 인간에게 여행이 지닌 근원적 의미를 잘 드러낸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이 단순한 레저 활동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인간에게 여행이 지닌 근원적 의미는 인간 존재의 내면적 차원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 또는 길 위의 인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고대 때부터 여행을 했습니다. 인간에게 여행이라는 행위는 원초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은 왜 여행을 했을까요? 물론 여러 가지 현실적 필요도 있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먹을 것과 살 곳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야 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또한, 미지의 지역과 사람들을 탐구하기 위해 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인간에게 여행은 자신이 살고 있는 기존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은 현재의 삶에서 뭔가 한계를 경험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기존 삶의 한계를 넘어 그 이상의 변화와 완성을 이루려는 인간의 내적 추구가 반영된 것이 여행이라는 행위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이 호모 비아토르의 개념을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내면적 자기완성 추구, 이를 향한 성장의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설명대로 인간은 일상 삶의 한계를 초월하여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허무주의의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결론적으로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삶을 강조한 것처럼, 인간은 결국 일상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여행이 지니는 근원적 의미는 이러한 호모 비아토르로서의 인간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일상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의미 추구의 길 위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기존 지역[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고자 하는 여행 행위 역시 일상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자기완성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여행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레저와 쉼의 목적도 일상적 삶의 고단함과 한계를 극복하고 육체적·정신적 안정을 회복하려는 자기완성의 의미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내면적 쉼과 의미 추구로서 여행의 의미가 최근 새삼 부각된 것은 현대사회 삶의 한계 또는 문제 상황과 연결시켜 성찰해볼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자기 정체성 혼란, 고통과 죽음 문제의 압박, 공동체성[연대감] 상실, 가치관의 혼란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물론 이 네 가지 양상이 현대사회 문제 모두를 망라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이들 문제 영역으로부터 여러 가지 구체적인 현대사회의 병증(病症)이 파생되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네 가지 문제 영역의 성격이 공통적으로 인간의 궁극적 차원과 연관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등의 질문에 대해 온전한 답을 찾지 못함으로써 네 가지 문제 영역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문제 상황은 인간의 내면에서 궁극적 의미의 결핍이 심각한 상태임을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한계에 이른 현대사회의 삶이 사람들에게 여행의 근원적 의미를 소환한 셈입니다.
현대인의 문제 상황에 대한 처방, 즉 여행을 통해 삶의 궁극적 의미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최근 드러나고 있는 구체적 사례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여행을 대하는 태도 또는 여행을 통해 기대하는 내용에 변화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단순한 즐거움 목적의 여행도 여전하지만, 여행을 통해 현실 삶에 소진된 내면을 재충전하려는 의미 추구 여행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 추구 여행을 ‘진정성 여행’이라는 개념으로 특성화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시도하고 있는 산티아고 순례 여행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올해 초에 오픈하여 화제를 모은 ‘강화 동검도 채플’(<문화일보> 2022년 2월 28일 게재 기사 참조)도 같은 맥락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동검도 채플은 조광호 신부님이 지인들과 뜻을 함께하여 설립하였지만 종교를 초월하여 “삶이 고단한 사람들은 누구나 와서 무언가 얻어갈 수 있는 영적 쉼터”를 표방합니다. 강화도가 기존에 지니고 있는 관광지로서의 성격에 영적 쉼과 의미 추구의 의의가 곁들여진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ㅣ오지섭 사도요한(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