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에게 ‘전태일’은 너무도 불편하고 불순한 이름입니다. 전태일이 불편하다는 것이 아니라 전태일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들은 스스로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태일이 불순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전태일이란 이름이 자기 자신이고, 생명이고, 희망입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박탈당한 채 착취를 강요당했던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입니다.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는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노동권을 요구했고 사회와 기득권자들은 그가 들추어낸 진실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그의 요구는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 삶을 새롭게 살 수 있게 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노동운동가 이전에 인간 발달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비록 그가 23년 정도의 짧은 삶을 살고 갔지만, 나이가 많은 어느 누구보다 성숙한 사람이었고, 마음이 따듯했고,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줄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로 깊이 도달하면 할수록 우리는 독자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이 주신 욕구를 체험한다”(Kinerk, Eliciting Great Desires, 3-4). 전태일은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신뢰했고, 자신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따라 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으며 ‘근로기준법’과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회 규범과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여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갈망을 묵살하곤 합니다. 사회와 기득권자들은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어 사회적 수치를 줍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그의 아버지는 그가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못마땅해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렬한 지지자인 어머니도 그가 노동운동을 한다는 소문이 돌자 걱정을 하며 노동운동을 그만두길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두렵지만 조금씩 자신이 계획한 것을 실행했습니다. 어려운 한자어가 섞인 근로기준법을 동네 아저씨의 도움으로 읽기 시작했고, 자기와 행동을 같이할 동료들을 모아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해서 신문사에 알렸습니다. 그래서 평화시장의 노동조건과 노동자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전태일과 동일시했던 노동자들도 자신 내면의 갈망을 따랐습니다.
전태일은 연민의 감정으로 타인에게 공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연민’이란 이스라엘의 문화에서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이 감정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그런 감정이고, 이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또 이 연민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그 고통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감정입니다.
1965년 가을, 전태일은 월급 1,500원의 미싱 견습공으로 취직하며 평화시장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보조 미싱사를 거쳐 1966년 월급 7천 원을 받는 정식 미싱사가 되었습니다. 이 월급은 여섯 식구가 살기에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적은 수입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연 다른 업체에 월급 3천 원을 받고 재단 보조로 취직합니다. 이유는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박한 월급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재단사가 되어 사장에게 그들을 위해 정당한 타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는 차비 30원을 받아 집에서 나오지만, 종종 점심을 굶으며 일하는 시다들이 안쓰러워 풀빵을 사주고 걸어서 귀가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이익과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그 고통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글을 자신의 일기장에 남깁니다. “나는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으로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이 짧은 글은 그가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얼마나 깊고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며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며 외칩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그는 죽었지만 많은 노동자의 마음 안에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2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자들은 그처럼 절규합니다. 노동이 인간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벌이 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비인간적인 비정규직 노동과 산업재해가 그 예입니다. 야만의 세상과 자본을 우상화하는 인간이 ‘전태일’이라는 이름 앞에서 불편한 이유입니다.
글ㅣ김정대 프란치스코 신부(예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