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흔히 주고받는 덕담 중 하나가 “행복하세요!”입니다. 형식적으로 건네는 인사일 때도 있지만, 진정 상대방을 위하는 깊은 진심에서 건네는 기원도 행복입니다. 행복이 모든 인간의 기본적 바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을 염원하는데 정작 스스로 행복하다고 만족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삶의 조건이 각박하고 치열해진 현대 사회에서 행복은 더욱 모든 사람의 간절한 바람이 되었습니다. 현세 삶의 힘든 상황과 마주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어떻게든 행복해지려 안간힘을 씁니다.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좌절하고 상실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현대 사회 삶의 상황이 행복의 조건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일까요?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일까요? 물론 현대 사회 삶의 상황이 갈수록 녹록지 않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행복하다 만족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에는 단지 행복을 이루기 위한 삶의 조건이 어려워진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정확히 규정하기 힘들기 때문은 아닐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애당초 목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애써도 행복하다 만족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애써 도달하려는 행복이라는 목표가 언제부터인가 잘못 설정되었다는 문제의식은 이미 여러 사람에 의해 제시되었습니다. 『행복 스트레스』 (탁석산 지음, 창비, 2013년)와 같은 책에서 대략의 내용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시대와 사회의 흐름이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인 내용과 형식의 행복을 목표로 설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런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형성하는데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물질적 가치만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문화가 대표적입니다. 물질적 자본주의 문화가 전반적인 지배력을 확산하면서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과 기준이 물질적 가치의 충족과 직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가치는 결코 모두에게 충족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소유하면 다른 누군가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충족의 정도 역시 문제입니다. 소유할수록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즉 물질적 가치 충족을 기준으로 설정된 행복은 좀처럼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행복 스트레스’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성찰하고 행복 목표 설정에 변화를 주는 일입니다. 더 이상 잘못 설정된 행복, 그래서 좀처럼 실현될 수 없는 허황된 행복을 좇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성찰하는데 한국인의 전통적인 행복 이해가 의미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전통적인 한국인의 행복 이해는 양면적 의미를 지닙니다. 한국인들은 한편으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크게 네 가지 범주로 표현했는데,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壽)’,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풍요롭게 사는 것(富)’, ‘세상에서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貴)’, ‘자손, 특히 아들을 많이 낳는 것(多男)’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한국인들이 오로지 현세적인 행복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닙니다. 현세적인 행복이 충족되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차원에서의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두 차원이 서로 충돌할 때에는 물질적인 차원을 단호하게 포기하고 보다 궁극적인 차원을 선택하는 것이 더 크고 가치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적인 한국인의 행복 이해는 양면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물질적 가치에 의한 행복보다 정신적 가치에 의한 행복을 더 고귀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행복 이해에서 어떻게 물질적 가치를 넘어 정신적 가치를 더 의미 있는 행복의 조건으로 삼을 수 있었는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분명 유교의 가르침이 한국 전통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로 대표되는 유교적 가치가 부적절한 물질적 풍요보다는 의로움에 근거한 정신적 가치를 우선하는 의식을 형성시켰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내용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행복 이해에서는 행복을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식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복 받는다’, ‘타고난 복’이라는 말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적극적이고 운명 개척적인 생각이 강조되고 있지만, 복에 대한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의식은 ‘주어지는 것’, ‘받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이 일생을 통해 누릴 수 있는 복은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복’이거나, 때와 상황에 따라 알맞게 ‘주어지는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천명(天命) 개념입니다. 천명은 글자 그대로 ‘하늘의 명, 즉 하늘이 주는 것’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유교에서도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 너머의 ‘그 무엇’을 인정합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설명할 수 없는 현세 삶의 상황들, 천재지변 등은 인간이 관여할 수 없고 충분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하늘이 부여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인간으로서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세적인 기준에서 좋은 삶의 조건을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관여할 수 없고 완전히 납득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내가 왜?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수없이 질문하고 원망도 해보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행복 또는 불행이란 것이 온전히 나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인정과 받아들임(수용)이 신앙의 핵심이지 않을까요? 세상과 삶의 모든 일이 온전히 나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 신앙의 핵심 의미가 드러납니다. ‘나 중심’에서 ‘하느님(초월적 진리)중심’으로 전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나를 버림(비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글ㅣ오지섭 사도요한(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