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적인 성격인 제게 첫 만남은, 그것도 혼자서 수십 명을 한꺼번에 만나야 하는 매 학기 첫 주는 아직도 잠을 설칠 만큼 불안하고 압도적인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설레고 생명력 넘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기지개를 켜고 안으로 잔뜩 웅크려 있던 몸의 근육과 생각의 근육을 풀며 새로운 자극을 준비하지요. 긴 겨울잠에서 깨어 봄을 맞는 동물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요? 새로운 모든 것과 그들의 생명력이 두렵기도 하지만, 벅차게 기쁜 마음으로 아침마다 집을 나섭니다. ‘잘할 수 있어!’하고 속으로 되뇌면서 말이죠.
돌아보면 이렇게 열린 마음은 ‘신뢰’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과 학생들에 대한 신뢰 말입니다. 물론 이 신뢰의 뿌리는 하느님께 닿아 있겠지요. 제가 학생들과 나눌 시간이 저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의미 있으리라는 믿음, 제가 읽었고 이제 그들과 나눌 책들이 제게 그랬듯 그들에게도 환희와 괴로움이 교차하는 열락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 매시간 목이 아프게 소리를 지르며 정성을 다하는 이 외국인 교수가 그래도 좀 사랑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비춰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 혹은 바람이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지요. 저는 무엇이든 확신을 갖기 힘든 성격과 생각의 구조를 가진 탓에 이런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 흔치 않지만, 그래도 이 느낌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압니다. 땅에 단단히 발을 딛고도 널리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다시 고꾸라지고 허우적댈 때가 오겠지만, 그때를 위해서라도 이 느낌을 마음에 담아 둡니다.
이번 학기에는 중세와 현대의 신비주의 영성을 가르치는데, 이 수업의 첫 시간에 제가 학생들과 늘 함께 읽는 글이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C.S. 루이스의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 에 나오는 그의 회심 체험입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온 루이스가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순간이죠. 그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전 자신이 마치 뻣뻣한 속옷이나 갑옷을 껴입어 가재 같은 형상을 하고 무언가 스스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그 갑옷을 벗어 버리는 순간, 어떤 강력한 힘이 자신을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실은 살아왔던 어떤 순간보다 자유로웠다고 말하지요. 의무와 강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신도 감지할 수 없는 내면과 외면의 어떤 힘이 맞닿아 그를 움직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필연성은 자유의 반대말이 아닐 수 있으며, 인간은 굳이 동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내 행동이 곧 나다(I am what I do)’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가장 자유로울 지도 모른다.”
“내 행동이 곧 나다.” 즉, 나라는 한 사람을 구성하는 고갱이, 나의 가장 깊고 연한 중심이, 말하고 의지하고 행동하는 바깥의 나와 분리되지 않는 일치를 루이스는 회심을 통해 경험했습니다. 그 순간이 곧 하느님과 일치되는 순간이기도 했던 거죠. 그러고 보니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비가인 시몬느 베이유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이 땅의 모든 것에서 필연의 메커니즘을 알아보고 그 필연 속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한없는 감미로움과 자유’를 음미하게 된다고요. 나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필연을 따르는 것이 곧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요.
하느님과 함께 들숨과 날숨을 쉬는 그 순간은 루이스와 베이유 같은 깊은 경지의 영성가들 뿐 아니라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도 열려 있습니다. 두려움을 내려놓고, 잘해야 한다는 강박과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즉 나와 내 행동의 간격을 없애고 오로지 그 순간에 집중할 때 얻게 되는 자유로움이 그 순간의 징표입니다. 행동의 바깥에서 나의 의지가 작동하여 주저하거나 욕심을 내면 그 일치의 순간은 반드시 깨지고 맙니다. 의심과 두려움과 회의가 그 틈새로 끼어들죠.
그렇게 나와 나의 행동이 일치하는 순간은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고 내가 만나는 이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뻣뻣하게 고개를 세운 우리의 자아가 고개를 숙이면,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서로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십니다. 아무럴 것 없는 우리의 일상이 그 일치의 순간 속에서 기도가 되고, 관상(contemplation)이 됩니다. 관상의 상태란 다름 아닌 하느님 안에서 나를 내려놓고 쉬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느님의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