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시나요?
연휴 동안 혼자 조용히 집에서 보내건 아니면 온 가족이 시끌벅적하게 모이건 그렇게 쉬고 함께 모일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건 안정적인 위치에 있다는 걸 의미할 겁니다. 사실 집이라고 하면 누군가에겐 그리운 시골의 고향집이, 누군가에겐 도시의 화려한 불빛 속 아파트가, 또 누군가에겐 투자의 대상으로서 부동산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3요소, 의식주에 해당하는 아주 중요한 생존요소입니다.
저는 집이라고 하면 20여 년 전, 처음 서울에 직장을 구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서울에서 방송작가라는 원하던 일을 구했으니 좋긴 한데 지방에서 올라와 당장 살 집이 없었던 거죠. 당당하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정작 퇴근 후 피곤한 몸 하나 편히 뉘일 곳 없는 현실, 그건 상상 이상의 빈곤감으로 밀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서울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는 후배와 연락이 닿아 급한 대로 함께 살면서 서울살이를 시작했죠. 하지만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니 불편한 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가족으로 함께 산 것이 아니었기에 불편함은 당연한 것이지만, 서울에서의 직장생활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겠다, 나만의 집을 찾아야 할 때가 됐구나, 마음을 먹었죠. 하지만 나만의 집을 찾아 나선지 단 하루 만에 저는 현실의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팍팍한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한 달 수입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이라곤, 아니 방이라곤 이른바 ‘지.옥.고’로 불리는 지하나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이 전부였던 거죠. 말로만 듣던 지.옥.고를 둘러보면서 저는 어느새 도시 빈곤층이 돼 있었습니다. 여자 혼자 살기엔 안전성부터 우려되는 현관문에, 지하 계단으로 내려갈수록 짙어지는 곰팡이 냄새는 처음 경험해보는 비참함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함께 일하던 선배작가가 지하철로 3,40분 정도 나가면 집값이 좀 더 쌀 거라 조언해 주었고, 저는 무작정 방송국이 있는 명동에서 일산으로 가는 3호선 지하철을 타고 그 선배작가가 말해준 동네에 내렸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부동산 중개소에 들어갔더니 마음 좋게 생긴 부동산 중개인 아저씨가 어떤 집을 찾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성당 가깝고 여자 혼자 살기에도 안전한 집’을 제 1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리곤 거짓말처럼 정말 성당 마당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13평 오피스텔 원룸을 소개받았습니다. 월세도 적당해 한 달 수입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요. 결국 부모님의 도움으로 보증금 문제를 해결하고 월세는 제가 매달 내는 것으로 정리가 됐습니다. 집 문제로 절대적 빈곤의 우울감에 빠져 있다가 감사기도가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죠. 그렇게 나만의 공간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행복한 2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지난 2019년, 전 세계적 호평을 받았던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20여 년 전 둘러보았던 반지하 방들을 잠시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반지하의 기억은 스치듯 사라졌고 다시 3년이 흐른 지난 달, 기상 관측 이래 115년 만이라는 폭우 속에서 침수피해에 사망사고까지 초래한 반지하 주택 소식은 20여 년 전 그 때로 저를 데려다 놓았습니다. 혹자는 ‘누추한 곳’이라고 표현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아 낮에도 불을 켜야 하고, 환기가 되지 않아 벽엔 늘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 있으며 벌레와의 동거는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 반지하 주택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0년 만에 재연된 수도권의 반지하 주택 침수피해와 인명사고에 서울시는 부랴부랴 ‘지하·반지하 거주가구를 위한 안전대책’이라는 걸 내놨습니다. 한 마디로 후진적 주거유형인 지하·반지하의 주거 목적 용도를 전면 불허하는 내용의 건축법 개정을 정부와 협의하겠다는 것이었죠. 반가운 소식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안전 문제로 지하·반지하 주택에서 살 수 없다면 주거 취약계층으로 불리는 이분들은 이제 어디로 가서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지하·반지하 주택에선 더 이상 법적으로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또 다른 지.옥.고인 옥탑방, 고시원으로 가야 할까요? 물론 서울시는 기존 세입자들에 대해 주거 상향을 통해 공공임대주택 입주 지원이나 주거 바우처 등을 제공하겠다고 밝혔지만, 도시전문가들조차 ‘수도권에서 도시 빈곤층이 살 수 있는 주택은 반지하밖에 없다’고 진단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얼마나 현실성 있는 지원대책이 될 수 있을지 우려가 됐습니다. 게다가 반지하 가구 수만큼 된다는 고시원과 옥탑방 가구에 대한 지원대책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지난 6월, 프란치스코 교황께선 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 8,9)를 통해 우리의 삶의 방식과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형태의 가난에 대한 성찰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힘겹지 않도록 우리가 가진 얼마 안 되는 것을 가진 것 없는 이들과 나누는’ 연대를 강조하셨죠. 그렇다면 집 문제로 힘겨운 이들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요? 그나마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사회초년생 같은 청년들을 위해선 청년보금자리 정책도 있고 셰어하우스로 불리는 커뮤니티 중심의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도 선보이고 있지만, 중장년 빈곤층과 홀몸 어르신들, 장애인들은 상대적으로 관심 대상에서 멀어지며 쪽방이나 고시원 등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들을 위한 주거 연대는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요?
한국가톨릭교회를 비롯해 전 세계가 기후위기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요즘입니다. ‘개인적 차원의 건강이나 복지, 전쟁과 같은 세계적 이슈들과 같은 수준으로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기후위기가 특별히 우리 사회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만 기후재난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주거 빈곤층의 보다 안전한 주거환경에 가톨릭교회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연대 방안을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