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입추(立秋)를 보내고 내일이면 마지막 삼복더위라는 말복(末伏)입니다. 올해는 일찌감치 불볕더위가 시작된 탓에 유독 힘든 여름을 보냈는데요. 이렇게 무더운 날이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예민해지곤 합니다. 평소 같으면 너그럽게 웃고 지나갈 말인데도 무덥고 지친 날엔 나도 모르게 가시를 박아 되돌려주기 쉽지요. 사실 무더운 날씨 핑계를 대긴 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하지요.
오래 전 모 방송국 아나운서실에서 한글날 특집이라며 말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영상을 제작해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 같은데요, 이른바 ‘밥 실험’이었습니다. 두 개의 병에 갓 지은 쌀밥을 담아두고 한 쪽엔 좋은 말, 힘이 되는 말, 용기가 되는 말을 꾸준히 들려주고 다른 쪽엔 나쁜 말, 짜증나는 말, 부정적인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는 거죠. 결국 한 달 후 실험이 끝났을 때 좋은 말, 힘이 되는 말, 용기가 되는 말을 들려준 병에선 하얗고 뽀얀 그리고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나는 곰팡이가 핀 반면, 끊임없이 나쁜 말, 짜증나는 말, 부정적인 말을 들려준 병에선 회색빛이 도는 검은 곰팡이가 피면서 밥이 악취와 함께 썩어버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생각하고 말한 대로 된다는 긍정적인 말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실험이었지요.
그런데 실험이 아니라 현실에서, 한 달이 아니라 벌써 석 달 넘게 거칠고 험한 말들이 난무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경남 양산 평산마을입니다. 40여 가구,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조용했던 시골 마을은 전임 대통령의 퇴임과 동시에 확성기와 스피커까지 동원된 군가와 장송곡, 욕설과 고함소리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처음엔 전 정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항의 정도로 생각됐지만, 날이 갈수록 변질되는 집회와 시위에 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르신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을 정도라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지만, 자신이 아내와 이혼한 것도, 집이 불타버려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도 모두 전직 대통령의 탓이라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시위 이유들입니다. 여기에 더해 아예 먹고 살기 위해 직업적으로 욕설방송을 하는 유튜버들도 있다고 하지요. 자신의 콘텐츠가 사람들이 하고 싶은 욕을 속 시원하게 대신 하면서 대리만족을 선사하고 있으니, 공공의 이익을 위해 욕설집회와 시위방송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예 장기적인 1인 시위를 위해 이웃 마을에 세까지 얻어 이사한 유튜버도 있다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결국 정치권이 나서서 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이나 혐오 표현을 금지하는, 이른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금지법을 만든다, 악의적 집회 방지법을 발의한다, 부산을 떨었지만 표현의 자유를 담고자 했던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어쩌다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물리적 고통을 가하는 독선적인 자유로 변질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CPBC 프로그램 <사제의 눈>에서도 ‘평산마을이 청담동이었다면?’이라는 주제로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힘없는 어르신들이 사는 자그마한 농촌의 시골 마을이 아니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이나 용산구 한남동의 고급 빌라촌이었어도 공권력의 대응이 동일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 거죠. 결국 평산마을의 욕설시위는 실제로 서울 서초구로 옮겨져 맞불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는데요. 우리 사회에 난무하고 있는 혐오와 저주의 말들, 이 말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를 향해 내지르는 분노일까요?
그러고 보니 굳이 혐오와 저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아 마음의 문을 닫고, 신앙마저 버리며 교회를 등지는 경우를 간혹 보게 됩니다.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의 말이 절망 속에 있는 그를 절벽 아래로 밀어뜨린 셈이 돼 버린 거죠. 그래서 말은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아서 입술을 한 번 떠나면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건가 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 교수는 ‘얼굴보다 말이 더 그 사람의 인격에 가깝다고 믿는다’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면 얼굴을 볼 게 아니라 말을 들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도자이자 시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 이해인 수녀 역시 『고운 마음 꽃이 되고 고운 말은 빛이 되고』라는 책을 통해 다른 사람도 살리고 스스로도 더욱 성장하게 하는 말, 세상을 따뜻하고 희망 가득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말을 함께 나눠가길 바란다는 바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가시 박힌 말 한 마디가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등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 다시 신앙을 되찾게 하는 힘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 12,35).
말의 씨앗이 머무는 우리 마음을 선한 말의 곳간으로 만드는 일, 그래서 내 생각과 말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매일매일 내 생각과 말을 다듬는 일, 그것이 나와 내 가족, 이웃과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드는 작지만 큰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