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저는 퍽 달갑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몇 년 전 처음 공포가 느껴졌을 때는 그저 몸이 좀 피곤해 그런가보다 가벼이 넘겼는데,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 머리가 하얘지고, 입이 마르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구토 증세까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지하철역에는 대부분 계단이 없어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일이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지하철역마다 꼭 한 대씩만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과 에너지 소모도 크고, 동행하는 이들에게 에스컬레이터를 못 탄다고 양해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엊그제는 그나마 하나뿐인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택시를 불렀습니다. 낭패감, 수치심, 억울함 등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이전에 없던 공포가 마음을 장악하고 몸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보기는 처음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 터인데, 실제 넘어졌거나 굴러떨어진 일이 없으니 심리적인 낙상의 경험이 몸의 반응으로 전이된 듯합니다. 인간의 무의식은 때로 속을 알 수 없는 친구와 같아 시간과 의지를 내어 돌보아 주어야 하죠. 어쩌면 제 무의식은 그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아픔을 호소하고 위험을 경고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신호가 미미했기에 듣지 않았고, 결국 무의식은 무관심 속에 무럭무럭 자라 지각과 의식을 왜곡하기에 이르러, 단지 편의시설일 뿐인 에스컬레이터를 마음속 공포를 재현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제 앞에 등장시킨 것이겠지요. 내 안의 또 다른 나, 속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소홀했던 결과입니다.
내면의 소리이건 외면의 소리이건, 낯설고 사소하다 여겨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들이 결국 공포와 혐오의 트리거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특히 그렇죠. 더구나 소셜미디어가 만든 각자의 동굴 속에 사는 요즈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당연시되어, 나와 다른 조건과 생각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이해하는 일은 귀찮고 수고스러운 노동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구비구비 얽힌 이야기들이 그저 짤막한 정보가 되고, 우리는 그 정보를 선택적으로 흡수하여 사람을 판단합니다. 어느 기업에 다니는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무슨 종교를 가졌는지, 진보인지 보수인지, 기껏해야 한두 줄의 정보를 통해 우리는 마치 한 사람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죠. 내가 분류해 놓은 데이터 밖의 삶의 조건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불필요하고, 낯설고, 불편합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이들과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사이, 얼굴을 모르는 이웃들은 점점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갑니다.
얼마 전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정신의학자인 전임의 나종호 교수가 8만 명의 노숙자가 사는 뉴욕의 정신과 응급실에서 수련의로 일한 경험을 담은 책입니다. 싱글맘, 트랜스젠더, 자폐아, 알코올중독과 조현병으로 고통받는 변호사 …. 저자가 만난 이들은 저마다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이들을 분류하는 정보는 모두 ‘노숙자’입니다. 노숙자라는 단어는 거부감을 불러오거나 기껏해야 동정심만 일으킬 뿐 이들을 거리로 내몬 지난한 삶의 이야기들은 들려주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을 생각하다 응급실을 찾은 이 그늘진 곳의 사람들이, 한 동양인 의사가 판단의 스위치를 끄고 오롯이 자신의 눈과 귀와 마음을 내어주자 깊고 깊은 사람의 이야기, 아프디아픈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도서관’이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일깨우는 스승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항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 일터에 늦게 도착한 노동자의 이야기, 가족을 등지고 떠났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 그렇게 예수님은 사람 도서관의 사서가 되어 겉사람 말고 속사람을 보게 하셨고, 저마다의 삶에 깃드는 은총과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우리들의 삶에 채워지는 사랑을 일깨워 주셨죠.
우리는 모두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의 이야기가 훨씬 풍부한 장서들입니다. 가장 익숙하지만 또 가장 읽지 않는 책, 우리들 각자의 속사람도 시간과 의지를 내어 읽고 이해해야 합니다. 타인을 향한 낙인과 편견은 우리의 속사람이 갖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 열등감과 결핍,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투사된 경우가 많습니다. 내 안에 숨어 사는 속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면, 내 이웃들의 속사람 이야기도 기쁘게 들을 수 있는 참을성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속사람과 속사람이 눈을 맞출 수 있는 세상은 아마도 조금 덜 두렵고 조금 더 사랑스러운 세상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