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란 하느님 안에 세 위격(位格)이 있다는 표현입니다. 위(位)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굳이 이렇게 표현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기록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따로 등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을 위해 삼위일체 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이론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존재 모습’을 표현한 용어일 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도 삼위일체라는 말은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강조되는데, 하느님께 구별되는 위격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그 계시를 준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복수 대명사로 표현한 경우(창세 1,26)와 ‘말씀’, ‘영’, ‘지혜’라는 말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삼위일체 신비가 예수님의 탄생 예고 때(루카 1,35 참조)잘 표현되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는(루카 3,22 참조)삼위께서 동시에 현존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실 때(마태 28,19 참조)세 위격을 분명히 언급하셨고, 특히 예수님께서 수난이 임박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요한 14,15-31; 16,5-15 참조)과 제자들을 위하여 바치신 기도(요한 17장 참조)에서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 묵상하며 백사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어린아이가 모래성을 쌓고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열심히 퍼 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아이와, 삼위일체 하느님을 머리로 이해하겠다는 나 자신 중 누가 멍청한 자인가?” 하고 자문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삼위일체 하느님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아들의 사랑 또한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따르셨고, 생명까지도 바치실 수 있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두 분 사이를 오가는 완전한 사랑의 움직임은 성령이십니다. 이처럼 삼위의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한 친교와 상호 증여로 살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하시며 우리를 삼위께서 이루시는 완전한 사랑의 일치에 늘 초대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삼위일체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하느님의 백성”(『교회 헌장』 4항)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서로 일치하며 산다면, 삼위일체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친교가 부족한 교회는 그 심장에 사랑이 식어 있다는 표지입니다.
글ㅣ이승환 루카 신부(교구 복음화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