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 35주년을 지냈습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지 35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노력으로 사건 은폐와 축소가 밝혀지고,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 민주화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는데요. 그 덕분에 3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민주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저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우리가 정말 민주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나? 정치적 구호로, 입술로 외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 민주주의가 정말 우리 모두의 삶 안에서 구현되고 있나?’ 하고요.
그 계기는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새 정부를 이끌어갈 인사들에 대한 검증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믿고 있었던 일상 속 민주주의가 허상이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인사 청문 과정에서 제기됐던 수많은 의혹들, 탈세와 위장 전입, 논문 표절과 부모 찬스, 여기에 간첩 사건 조작 검사까지 공직기강을 바로잡겠다며 임명되는 걸 보면서 민주주의의 기본인 공정과 정의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상식조차 존재하는 세상인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특히 엄마 찬스, 아빠 찬스로 불리는 이른바 부모 찬스는 어느 순간 청문회의 단골 메뉴가 되면서 이젠 유행이 된 듯 보였습니다. 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장난감을 사주는 것밖에 없어 미안하다는 평범한 부모들의 하소연 속에서 한 나라의 장관을 하겠다는 그들의 부모 찬스 논란은 마치 딴 세상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들렸습니다.
수능을 준비하기에도 여념이 없는 고등학생이 대학교 혹은 대학원에 가서나 쓸 법한 주제의 영어 논문을 국내 심지어 해외 학술지에 게재하고, 대학 졸업생조차 지원서 내기 주눅 들 만큼 내로라하는 연구소에 고등학생이 인턴으로 이름을 올린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일이지요. 그나마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해서도 공부와 한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쪼개 쓰고,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의 감격도 잠시, 쥐꼬리 월급에 학자금 대출 상환, 월세, 생활비까지 걱정하다 보면 어느새 20대 중후반의 어른이 돼 버리는 게 우리 시대 평범한 청년들의 현실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이라 하더라도 부모 찬스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스펙으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차지한 그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팍팍한 삶인지도 모르지요. ‘왜 밥을 못 먹어? 그럼 고기 사 먹으면 되지!’ 식의 이해 부족 인간은 결국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인간성 부족의 부모와 1등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부모 찬스! 세상을 일이십 년 살아선 절대 만들 수 없는 거미줄 같은 혈연과 학연, 지연이 총망라된 인생 최고의 기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부모 찬스는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대한민국 부모의 이름으로 자녀의 입시와 취업, 미래까지 공공연하게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이고요.
부끄럽지만 저 또한 과거 엄마 찬스를 노렸던 적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1990년대 초, 대학을 갓 졸업하고 가톨릭교회 내 학교의 중등교사로 임용되기를 바랐던 저는 어머니의 고향 오빠로 불렸던 모 교구장 주교님을 찾아뵈러 간 적이 있습니다. 교구민들에게는 물론 교회 내에서도 존경받던 그 주교님은 오랜만에 만난 고향 동생을 반갑게 맞으며 안부를 묻고 대학을 갓 졸업한 딸의 취업을 이리저리 돌려 부탁하는 어머니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죠. 물론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공정이었고 상식이었습니다. 교구장직에 계시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적인 인연과 학연, 지연에 기댄 부탁과 청탁을 많이들 하셨을까요?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그저 자식을 위한 부모의 애틋한 마음 정도로 헤아려 따뜻하게 받아 주시면서도 결과는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처리하셨던 겁니다.
물론 청문회장에 선 그들의 부모 찬스엔 어떠한 불법과 탈법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뱀처럼 교묘한 편법은 한 번, 두 번 자녀의 인생에 축적되고 그 사이 부모와 그 자녀들은 둔감해져 버린 양심으로 똘똘 뭉친 가진 자들의 무리 속에서 편법이 공정이 되고 상식이 돼 버린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지요.
혹자는 반문합니다. 가진 자들끼리의 연대가 뭐가 나쁘냐고.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고 내가 가진 것을 저 사람에게 나눠주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저 사람에게 조금 나눠 받았을 뿐인데, 가지지 못한 자들끼리의 연대만 선(善)이고 가진 자들끼리의 연대는 악(悪)이냐고? 하지만 그 답은 명확합니다. 가진 자들끼리의 연대엔 공정과 정의가 빠져 있습니다. 공동선이 없고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만이 가득한 연대이기 때문에 그것은 악이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구약의 옛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제사가 아니라 ‘공정과 정의’(이사 1,15-17 참고)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또 다른 무엇인가로 맞바꾸기 위한 연대가 아니라 세상의 약자들, 고통받는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이 하나로 이어지는 연대, 그리하여 다 함께 공동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대, 그런 연대만이 공정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에겐 무엇보다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 찬스’가 있습니다!
글ㅣ이지혜 체칠리아(CPBC 가톨릭평화방송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