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고등학교에 부임한 지 어느덧 3개월이 되어 갑니다. 사제의 ‘학교’ 생활은 본당 사목과는 사뭇 다른 특수한 삶입니다. 사제직무의 본질은 같지만, 생활 시간표, 만나는 연령층, 사제의 포지션 등 외적인 환경들이 다릅니다. 가장 특수한 점이라면, ‘가톨릭 신앙이 없는 학생들과의 만남’입니다. 신앙을 모르는 학생들과 만나며 제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 청소년이 겪는 현실 >
1. 공감 없는 문화 풍토
청소년이 겪는 현실은 가혹하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공부’의 목적은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선물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의 ‘능력주의’는 출세를 위한 하나의 수단 정도로 공부를 폄하시키고 있습니다. 더불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는 ‘황금만능주의’의 영향도 지대합니다. 학생들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으면, ‘돈 많은 백수’라고 합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행복의 기준이자 척도가 된다면 내가 돈의 주인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될 위험성이 다분합니다.
이러한 ‘능력주의’와 ‘황금만능주의’는 ‘나’만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를 창조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라는 사고방식은 자연스레 공동체성과 사회성마저 파괴시키고 맙니다. 특별히 3년간 앓아 온 Covid-19가 이런 총체적 문제들을 담은 냉소주의, 곧 ‘이웃에 대한 공감 능력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폭력뿐 아니라 익명성을 내세운 사이버 폭력 등의 ‘죽음의 문화’가 대사회적인 문제로 드러나는 이유 또한 공감 능력의 약화가 아닐까요?
2. 종교성
현대의 여러 종교학자는 현대인의 종교성을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것은 원하되 종교적인 것은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희미한 믿음은 있지만, 굳이 종교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성인뿐만 아니라 청소년에게서 특히 두드러지는 모습입니다. 가정 안에서 신앙생활로 갈등을 빚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흔히 세대 간 문화적 격차를 두고 세대 차이라고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과 종교활동에 대한 이해와 인식 또한 세대 간 가치관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성찰과 질문 >
공감 없는 문화적 풍토와 현대의 종교성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저는 성찰과 함께 자문합니다. “공감 능력이 결핍되어가는 현대 청소년들을 나는 얼마나 공감하려고 했는가? 신앙생활, 종교활동은 원치 않아도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을까?”
< 예수님의 인격 – 공감과 경청 >
예수님의 공생활은 ‘만인을 향한 공감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지요(요한 11,35 참조). 우리는 이성적 존재지만 감정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어른들이 청소년과 공감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청소년이 겪는 현실과 그들의 감정에 마음을 쏟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신념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고집이 되면 마음의 문은 닫히고 소통의 부재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청소년들의 목소리와 비언어적 표현에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 그리스도인의 삶 – 증거 >
‘영적인 것은 원하지만 종교적인 것은 불편해하는’(SBNR) 현대의 청소년들에게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증거하는 삶’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 믿으며 나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랑과 나눔, 섬김과 봉사의 삶은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영적 심성에 노크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복음화는 교세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되어 감동의 바이러스를 전하는 것입니다. 감동을 주신 예수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다정한 눈빛과 온유한 미소로 청소년들에게 다가가는 사랑의 증거가 요청됩니다.
< 갈무리 >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루카 24,13-35)를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은 공감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셨고, 감동한 제자들은 증거하는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순간에 동반하셨습니다. 따라서 공감과 증거에 바탕한 동반의 영성이 청소년들 마음에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길이 아닐까요?
“많은 젊은이들에게 하느님과 종교와 교회라는 말들이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이 매력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면 그들의 감수성은 일깨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말고, 그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제39항).
글ㅣ박윤흡 이윤일요한 신부(효명고등학교 종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