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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의 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2-05-06 11:48:19 조회수 : 598

처음 농사일을 시작할 때, 아랫집 할아버지께서 지나가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허허, 고추밭에서만 살지 말고 야콘 밭도 가봐야지.”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몰라서

왜요, 할아버지?”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셨지요.

밭에 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라. 그런데 수녀님이 고추밭에서만 사니까 고추는 잘 되는데, 저기 야콘은 비리비리 하잖어.”

 

듣고 보니 정말 맞았습니다. 그때 저희는 고추를 많이 따고 싶어서 고추에 전념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콘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요. 순간 제 자신이 마치 자녀를 키우면서 사랑 없이 돈으로, 혹은 물건으로 키우는 모습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밭의 생명들도 농부의 음성과 발소리를 알아듣고 안심하고 자랍니다. 복음의 이 원리가 우리 삶의 원리와 일치 한다는 것이 말씀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 제게는 더욱 이 일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목자입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착한 목자는 그들과 함께합니다. 양들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지요. 밭의 생명들이 농부의 음성을 듣고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지만, 농부가 그들의 소리를 알아듣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삯꾼처럼 그들을 거두어 이용가치로 보던가 아니면 그들을 버리고 떠나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녹음의 풍성함처럼 계절마다 우리 밥상의 풍요로움을 볼 때, 감사로움과 한편으로는 이 풍성함에 함께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며 미안한 마음이 됩니다. 때때로 자연 안에서 느끼는 이 평화로움이 세상 곳곳에서 분투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들과 괴리되어 있는 듯이 느껴질 때 정말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 저는 밭으로 나가 더 땅으로 가까이, 바닥으로 가까이 몸을 기대어 손을 쓸어줍니다. 그리고 떠나지 않겠다고, 끝까지 돌보겠다고,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마음으로부터 고백합니다. 제가 세상 곳곳의 모든 어려움들과 함께 할 수 없지만, 생명을 돌보는 자리에서 기꺼운 이 삶이 공명을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고 믿으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 조경자 마리 가르멜 수녀(장상연합회 JPIC분과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