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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로 오시는 분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1-12-17 09:54:14 조회수 : 844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이사 45,8). 맑은 날 이른 아침에 따뜻한 수증기가 풀잎이나 나뭇잎 같은 약하고 찬 물체를 만나 맺히는 물방울이 이슬입니다. 이슬은 풀잎 같은 우리 인생 위에 소리 없이 맺힙니다. 그것도 저 높은 데가 아닌 땅의 표면 가까운 곳에서요. 이슬은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께서 땅에서 고통을 받은 인간에 맞닿아 함께 하시려고 내려오신 강생의 신비를 조용히 깨닫게 해 줍니다.

객지에서 많은 고생을 겪는 것을 바람 속에서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잔다고 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잘 곳이 없는 사람을 무숙자(無宿者)라고 하지 않고, 사방이 드러난 길()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라고 노숙자(路宿者)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슬 맞고 자는 사람이라고 하여 노숙자(露宿者)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슬은 약한 이, 슬픈 이, 배고픈 이, 낙담한 이에게 내리는 물방울입니다.

시인 정호승 님은 이슬은 풀잎의 눈물이 아니라, 불쌍한 인간을 위해 흘리시는 하느님의 눈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간밤에 흘리신 하느님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 있다.” 그렇다면 노숙자의 이슬은 저 엄청나신 분이 집 없이 길에서 자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흘리는 약하디약한 눈물입니다.

 

제게 올해는 참 어두운 한 해였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제가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크게 실망하여 마음이 매우 무겁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둡고 무거운 마음의 짐이 사라져 가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모두가 내 가슴에 맺게 된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슬은 어두운 새벽이나 구름이 끼지 않고 바람이 없는 밤 또는 동이 터 오르기 전에 가장 잘 맺히듯이, 인생이 어둠의 터널을 지나갈 때 하느님께서는 소리 없이 은총을 내려주시는 분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슬은 계속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다가 어느덧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런 이슬을 보고 덧없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정호승 시인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슬은 햇살과 한 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슬이 햇살과 한 몸이 된 것을/ 사람들은 이슬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부활하셔서 다시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처럼요. 우리는 결코 덧없이 이 세상을 사는 게 아닙니다.


|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