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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라반을 통해 배우는 가족의 갈등과 화해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1-09-29 18:01:16 조회수 : 1150

논리적으로 정리된 역사서나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지혜서와 달리 창세기는 오히려 사람 사는 곳의 갈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중 라반과 야곱의 갈등은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원형적 드라마입니다. 타향 하란으로 도망간 야곱의 삶은 현대의 이주자, 난민, 외국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일부일처제가 공고화되지 않았고 근친상간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고대라는 점을 고려해 상징과 비유를 통해 이해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장자 상속권을 훔친 야곱이 아마 고향에 남았더라면 어머니의 돌봄 아래 잘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란은 낯선 곳이니 고생길이 열린 셈입니다. 외숙인 라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대와 달랐습니다. 첫눈에 반한 라반의 작은딸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서 7년을 품삯도 제대로 받지 않고 일을 했는데 생기 없는 눈의 큰딸 레아와 강제로 혼인해야 했고, 다시 7년을 일한 후에야 라헬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타향이 고향과 같을 수 없어 가솔을 거느리고 떠나야겠다는 의지를 라반에게 밝힙니다. 그러나 라반이 싼값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일꾼인 야곱과 자신의 두 딸을 호락호락하게 보내 줄 리 없었습니다. 어려운 일감을 주면서 어떻게든 사위와 딸들을 자신에게 남겨 두려 하였습니다. 비슷한 상황은 21세기에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현대는 가문, , 자식 사랑이 전부였던 과거와 달리 부모 자식 간의 본능적인 유대조차 왜곡시킵니다.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녀들 역시 부모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 바닥돌과 자원 정도로 생각해서, 다른 부모와 비교하면서 부모로서의 무능함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라반과 야곱도 그런 긴장관계를 보이긴 하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가족에 대한 애정 혹은 정의와 공평이라는 관념으로 포장하는 가식적인 현대인들과 달라 보입니다. ‘챙겨갈 몫은 알아서 열심히 일해 가져가라.’ 하는 좀 야박한 모습도 있고, 수호신상을 훔쳐 갔다며 이주를 끝까지 방해했지만, 라반은 결국 야곱과 계약을 맺고 합의합니다. 그리고 축복의 입맞춤으로 사랑하는 딸들과 손자들을 배웅해 줍니다.

말로는 자식들이 빨리 독립해서 나가면 좋겠다.’ 하면서 막상 그 길을 가려는 자식의 앞길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방해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능한 자신의 인생을 자식에게 보상받으려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독립하겠다고 말하면서 내가 할 일을 부모에게 떠넘기며 책임지라고 말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물론 모두 어렵고 힘든 사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의 삶을, 또 자식이 부모의 삶을 책임지거나 간섭하려 한다면 결국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말 것입니다. 개인보다 가문을 중요시하는 유교 시대가 아니라 개인 중심의 민주주의 시대이지만, 고대의 신화적 인물의 지혜, 간섭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가 더 아쉽게 느껴집니다.


|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