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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와 맹물로 연명했지만 나눔의 기쁨 가득한 신앙 공동체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19-09-26 조회수 : 823

풀뿌리와 맹물로 연명했지만 나눔의 기쁨 가득한 신앙 공동체

[순교자 성월 특집] 박해 시대 신앙을 지킨 힘, 교우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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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발행 [1531호]

▲ 옹기를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 한 가정집. 가톨릭평화신문 DB



천주교 신앙을 믿는 이들이 한데 모여 살며 마을을 이룬 교우촌(敎友村)은 조선 시대 박해 시기 생겨난 신앙 공동체다.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온 이들은 서로에게 부모, 형제, 자매가 돼주며 서슬 퍼런 칼날 아래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던 데는 교우촌을 통해 하늘나라의 삶을 지상에서 살았던 체험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선교 사제들은 교우촌 신자들의 삶에서 가진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신앙생활을 한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봤다고 고백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온 교우촌 공동체의 삶을 기억하며, 지금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생활 환경


박해를 피해 신자들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길도 나지 않은 산골짜기에서 터전을 일구는 일은 험난했다. 땅이 척박해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곳을 찾아다녔다. 밤이면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이었고 곳곳에 맹수들이 우글거렸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곳에서 신자들은 화전(火田)을 일궈 잡곡을 심었다. 산나물과 과일, 약초로 연명했다. 여름 장마철에는 급류에 휩쓸려 가고, 겨울에는 폭설에 파묻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람들에게 거처를 들켰다 싶으면 빨리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 했다. 거처를 너무 자주 옮겨 다니다 보니 걸인보다 더 심한 굶주림을 겪었다. 모방 신부는 편지에서 “영하 10~12℃가 되는 한겨울에 거의 벌거벗은 어린애들이 추위로 새파랗게 얼어가는 것을 보았다. 어떤 시기에는 산에서 뜯어 온 풀뿌리와 맹물이 교우들의 유일한 양식”이라고 전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비참한 생활이 이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는 천주교 신앙이 더욱 굳건해지고 전국적으로 퍼지는 계기가 됐다. 여진천(원주교구, 수원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2018년 11월 ‘교우촌 믿음살이와 그 지도자들’을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박해를 피해 늘 떠나야 하는 특성 때문에 물질 중심주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맡기는 삶이 됐다”고 분석했다.



신앙 생활

교우촌 신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또 교리를 서로 가르쳐 주며 신앙을 이어갔다. 주일이면 기도문을 외고, 교우촌 회장의 복음 해설을 들으며 하느님 말씀을 배웠다.

사제가 교우촌에 오는 날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사제를 기다렸다. 움막은 성당이 되고 나무판자는 제대가 됐다. 흙벽에 박아 놓은 십자가가 유일한 장식이었다. 사제가 성사를 마치고 돌아가면 아쉬움에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통곡했다. 극기와 단식은 일상이었고 사순 시기에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이어갔다.

글을 알고 학식이 있던 이들은 이웃들에게 기도문을 알려주고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본분으로 알았다. 이들은 밤낮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천주교를 알렸다.

교우촌 신자들은 교리서와 기도서를 소중하게 여겼다. 박해가 극렬했던 때에는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성경과 교리서, 성상을 숨겨놓고 지냈다. 교우촌이 발각되고 신자들이 줄줄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이들은 감옥 안에서 함께 모여 기도를 바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신앙 실천

샤를 달레(1829~1878)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모든 이가 그 가난한 가운데서도 아무것도 없는 형제들에게 도움을 베풀 줄을 알았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주니 이 불행한 시절보다 우애가 더 깊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목격한 노인들은 그때에는 모든 재산이 정말 공동으로 쓰였다고 말한다.”

교우촌 신자들은 새 신자 가족이 교우촌에 오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내줬다.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과부와 고아도 교우촌에선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외교인들은 과부들이 동냥하러 다니면 ‘천주학쟁이들’한테 가보라고 할 정도였다. 하느님 말씀에 따라 궁핍한 가운데서도 애덕을 실천하며 쌀 한 줌, 물 한 모금이라도 나누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재산이 있는 이들은 자신의 집을 공소로 쓰도록 내놓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순교자들의 증언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자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전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이시임 안나)

“사람의 가장 큰일은 천주를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고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이 큰 본분을 채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한다면,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김종한 안드레아)

“제가 아들을 보지 못할지언정 저는 저의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최 비르지타)

“문초를 당하면 모든 것을 나에게 뒤집어씌우시오. 천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최봉한 프란치스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습니다.”(홍필주 필립보)

출처: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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